황우석 박사 단상

잡담 | 2005/11/19 21:24 | djhan
하나.
[플라네터스]라는 SF 만화가 있다. 초대형 사고가 발생해 300명이 넘는 사람이 죽는데도 불구하고, 담당 책임자는 "폭발한 엔진이 남긴 데이터엔 만족하고 있다. 다음엔 실패하지 않을 테니 기대해 달라"는 말을 남기면서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간다.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나는 대의명분을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생각은 쥐뿔만치도 없고, 그걸 강요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이 만화는 우주 개발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사람들이 죽거나 혹은 다치는 것은 대단히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우 불쾌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선 이걸 보고 '멋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의명분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와 정신력을 갖춘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A4 용지 200장을 채우기에 충분한 불평불만과 핑계를 늘어놓은 다음에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댈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절대 다수의 대중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식의 비정상적인 논리 회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은 특히 보수 정당에 속하거나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북조선 인민들을 독재자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 총을 들고 전진하라고 외쳐대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직접 총을 쥐어주며 직접 최전선에서 목숨바쳐 싸울 것을 요구하면, 그들은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나가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탈 것이 분명하다. 홍사덕이 이미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들의 머릿속엔 '내가 하면 전략적 후퇴, 남이 하면 도피'라는 논리 회로가 들어간 모양이다. 찜쪄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둘.
지금, 신문과 방송에선 황우석 박사를 추켜세우느라 난리도 아니다. 처음에는 칭찬으로 시작하여 나중엔 찬양이 되었으니, 황우석 박사는 우장춘 박사나 아폴로 박사(조경철 박사)를 능가하며 이순신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적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공학자, 과학자, 의학자가 존경받고 그들의 업적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사회는 건전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사실이다. 냉정함과 객관성을 잃어버리면 차라리 외면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줄기세포 복제 연구에서 이룩한 성과는 의학적이고 공학적인 견지에서 조명받는 대신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산업'으로 과대 포장되었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적이 없는 '국익'이란 말이 맨앞에 튀어나왔고, 가느다란 쇠젓가락을 쓰는 바람에 자연스레 단련된 한국인의 손재주를 상찬하는 말이 뒤를 이었다. 연구에 사용된 난자의 출처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 하는 못난 한국인이나 하는 짓'으로 매도당했다.

셋.
그러던 와중에 '황우석의 정신적 형제'로 추켜세워지던 새튼 박사가 갑자기 연구용 난자의 출처에 의문을 제기하며 황우석 박사와 결별을 선언했다. 불행히도 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계적으로 공인된 과학 잡지인 네이처와 사이언스마저도 공개적으로 황우석 박사를 의심하는 글을 싣기에 이르렀다. 이걸 죄다 한데 싸잡아서 '한국인이 땅을 사면 배아파 하는 못난 미국인'들의 음모로 평가절하하기는 대단히 쉽고, 실제로 한국 신문과 방송의 논조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음모론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과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약간 다르다. 10살짜리 소년이 80살 먹은 할아버지한테 존댓말을 쓰는 것은 법적으로 강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이며 도덕적으로 예의바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만일 머리에 피도 안마른 꼬마가 감히 할아버지에게 반말을 한다면, 나는 그냥 안 놔둔다. 당장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린다. 내게 반말을 하는 경우에는 두 번 다시 나불대지 못하게 턱주가리를 부숴버릴 거다.

황우석 박사는 스스로 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다. 대다수 한국인들도 신문 방송에서 말하듯이 '국익이 걸린 일에 윤리 도덕이 무슨 상관이랴?'라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생명 공학 - 특히 인간 복제가 관련된 분야에는 세계적으로 다양한 시민 단체와 종교 단체가 끊임없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미 1997년 11월 11일 유네스코 29차 총회에선 '인간 지놈과 인권에 대한 보편적 선언'이 채택된 바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제 10 조 : 특히 생물학, 유전학, 의학 분야에서 인간 지놈에 대한 어떤 연구나 그 응용도 개인, 집단, 또는 국민의 인권, 기본적 자유, 그리고 개인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

줄기세포 연구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논리가 적용될 것이란 사실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요컨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윤리 규정에선 '한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우선하고 있다. 여기 대해서 '강대국들이 인권을 핑계삼아 조그만 나라의 국익을 침해하려 든다'고 격분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인권을 구실삼아 시작된 이라크 전쟁에 발을 들이밀면서, 국익을 핑계삼아 북한의 인권을 못본 척 하는 이율배반적이고 표리부동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까. 인생 별 거 있나,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엄청난 국가 이익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발상에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줄기세포를 배양해서 복제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원천기술의 개발에 비견할 수 있다. 난치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으려면 배양 복제된 줄기 세포를 가지고 오랜 시간을 들여 힘든 연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에서 떠드는 말을 듣고 있자면 내가 300살까지 살 방법을 찾을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넷.
과학은 전지전능한 신의 기적이 아니고 과학자 역시 성웅(聖雄)이 아닌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과학 발전의 역사는 전쟁 기술의 발달과 맥락을 같이 한다. 도덕적이며 선량한 과학자는 이야기책에나 존재한다. 링컨이나 김구같은 정치가를 찾아보기 어렵듯이 슈바이처같은 의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자신의 특허권을 아낌없이 포기하며 교류 전기를 보급하는데 앞장선 니콜라 테슬라처럼 위대한 과학자는 바보 멍청이 취급받기 십상이다.

미국 우주 개발의 일등공신인 베르너 폰 브라운 역시 영웅이 아니라 세속적인 과학자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살인 병기인 V-2 로켓을 만들었지만, 그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패전 후에는 전범으로 기소당하지 않기 위해서 미국에서 주급 17달러라는 박봉을 받으면서 일해야 했다(물론 급료는 곧 인상되었다). 그의 연구는 아폴로 로켓뿐만 아니라 대륙간 탄도탄을 만드는 데에도 공헌했다. 요컨대 브라운 박사는 '내가 만들면 우주 로켓, 남이 만들면 살인 병기'라는 논리 회로를 갖춘 사람이었다.

황우석 박사께선 지금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그가 적극적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자신의 연구 성과를 알리면서 척박한 생명 공학계에 활기가 돌고 전체 과학계의 위상이 더불어 높아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장 눈에 띄는 2차 성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연구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던 난치병 환자들이 절망할 것이 당연하고, 막연한 경제적 이익을 꿈꾸던 일반 대중들 역시 등을 돌릴 것이 뻔하다. 지금은 연구실로 돌아가 또다른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를 해야 될 때이건만 예기치 못한 윤리 문제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하지만 박사님께서 '내 연구는 국익, 남의 간섭은 딴죽 걸기'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소련과 군비 경쟁을 벌이던 5, 60년대의 미국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죄책감이니 뭐니 하는 고상한 감정을 느낄 여유도 없이 로켓 개발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따뜻한 인간의 권리보다 냉혹한 군사력과 국가적인 자존심이 우선했던 냉전 시대는 이미 끝난지 오래다. 국제적인 윤리 문제 의혹을 '영어가 서툴러서 말을 잘못 전달했다'라는 서툰 변명으로 빠져나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런즉슨 박사님께선 하루속히 의혹이 될만한 것들은 빨리 털어버리고 연구에 매진하시기 바란다. 그것이 박사님 자신과 과학계는 물론이고, 국가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2005/11/19 21:24 2005/11/19 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