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가 균형을 이루고 사회 공동체의 응집력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북유럽이나 중부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연쇄살인 사례를 발견하기 어려운 반면, 옛 소련, 컬럼비아, 멕시코, 남아공 등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미국 못지 않은 연쇄살인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P12)

... 눈에 잘 띄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 수많은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힘찬 날갯짓을 계속하면, 연쇄살인범의 무참한 공격 앞에 참혹하게 희생당할 무고한 인명들을 살려낼 수 있다... (P399)

- 표창원 지음, [한국의 연쇄살인] 중에서


우리나라 대학교수가 쓴 책은 매우 위험하다. 대학원생을 시켜서 원고를 작성하거나, 그동안 썼던 논문을 긁어모아 대충 편집해서 책으로 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의 연쇄살인]을 쓴 사람이 대학교수란 사실을 알았다면, 이 책을 인터넷으로 사는 대신에 직접 서점에 가서 확인해 본 다음에 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으로 책을 샀기 때문에 지금 맹렬하게 후회하고 있다!

콜린 윌슨은 [잔혹]에서 지난 수백년간의 무차별 연쇄 살인 사건을 분석하여 [확신인간 Right Man] 이론으로 그 잔인무도한 범죄의 동기를 밝히고 더 나아가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파헤치려 했다. 그것은 비록 성공적인 결말을 보진 못했지만 참신한 시도임에 분명했고 진정한 연구자다운 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표창원 교수는 아무런 분석도, 해석도, 연구도 하지 않았다.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마이크로 필름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쭉 늘어놨을 뿐이다. 그나마 신문에 실린 사진은 깨끗하기라도 하지, 여기 실린 사진은 웹서핑으로 찾아낸 사진을 썼는지 아니면 하드 용량이 부족해서 100dpi 이하로 스캐닝을 했는지, 뻥튀기된 도트가 보일 지경이다. 이럴 바에야 사진 따위는 차라리 싣지를 말 것이지.

생계형 연쇄살인과 종교집단에 의한 연쇄살인, '분노하는 개인'에 의한 연쇄살인, 변태성욕자에 의한 연쇄살인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했다. 특히 왜정시대에 일어난, 종교집단에 의한 광기어린 대량 연쇄살인 사건의 대표적 사례인 [백백교 사건]에 대해서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책을 집필한 의도가 무엇인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아니, 그걸 언급하지 않고 한국의 연쇄살인 운운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사건을 설명하며 범인들의 덜 떨어진 행태에 면박을 주고 그들이 처벌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소리높여 주장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을 고집하다보니 사회적인 흐름을 아주 엉뚱하게 읽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90년대를 설명하면서 '급격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에 휩쓸려 존중되어야 할 권위'마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가치관에 혼란이 오고 그로 인하여 좌절감에 빠져 있던 성격이상자들이 준동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연쇄살인 사건이 폭증했대나 뭐래나. 내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덜 떨어진 주장은 앞으로나 뒤로나 참으로 보기드물 것으로 사료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한 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보여지듯이, 처음에는 진보주의적인 입장에서 연쇄살인 사건의 사회적인 책임을 준엄하게 묻는가 싶더니만, 뒤쪽으로 갈수록 보수적인 시각으로 돌아서더니 마침내는 모든 개인이 책임지고 나서서 밝은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70년대식 새마을 운동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결론을 내린다. 젠장, 지랄하네. 그런 건 대학교수가 내림직한 학구적인 결론이 아니라, 동사무소 동대장도 내릴 수 있는 뻔한 결론이다!

여하간 이래저래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책이다. 이걸 12,000원 받고 판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나 다름없다. 추리소설을 쓰느라 연쇄살인 사건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이 사야만 할 책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전혀 필요없는 책이니 관심 끊으시길.
2005/09/12 00:41 2005/09/12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