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마치고 붓을 내리니 슬그머니 취기가 올라왔다. 주변에 둘러선 무리는 내 글을 읽으며 감탄을 멈추지 못하였다.
"이렇듯 가슴 들끓는 의기로운 문장은 참으로 오랫만이외다! 참으로 대단하오!"
그 때 술집 주인 누루씨가 미친듯이 두 손을 휘저으며 사람들을 뚫고 달려나왔다. 누루씨는 나와 칼잡이를 붙들고 늘어지더니 근심어린 얼굴로 이렇게 충고하는 것이었다.
"아니되오이다. 정녕 아니될 일이오이다. 두 분께선 어찌하여 이런 글을 청하고 이런 글을 닦아 준단 말입니까. 오른뿔한 날범은 태후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신하요, 나랏일을 쥐락펴락 하는 실세올시다. 문무백관(文武百官)이 그에게 허리굽혀 절하고 여덟갈래(八路) 군대도 그를 따르니, 날범을 꾸짖고 욕하는 글과 말을 퍼뜨리면 칼잡이님이나 부루님의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알알이 오르던 취기가 싹 가셨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리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허세를 부렸다.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칼잡이로 말하자면 나보다 한술 더 떴다.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허나 내가 청한 일에 부루형의 이름을 끌어들이진 않을 것이외다."
그는 붓을 들어 두루마리 아래쪽의 글을 벅벅 지우더니 다음과 같이 고쳐썼다.

 - 벚꽃임금 3년 7월 보름, 이름없는 칼잡이(無名劍客)가 온나라 사람들에게 고하다 -

스스로 모든 책임을 감당하려는 칼잡이의 의기로운 마음이야 드높았건만 누루씨의 근심이야 가실 줄 몰랐다.
"칼잡이님의 이름을 내세운들 소용없는 일입니다. 관부가 협객들의 동태를 감시하고자 우리 술집을 눈여겨 본지도 이미 여러해 됩니다. 여기 오는 손님 중에 이만한 글을 지어낼 사람이 부루님 뿐이란 사실을 어찌 아니 모르겠습니까? 그런즉슨, 두 분이 해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제가 있는한 그 누구도 부루형의 솜털 하나 건들지 못할 것이외다."
칼잡이는 오른손을 칼자루 위에 지긋이 얹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저는 지금부터 이 글을 서울 큰거리 사방팔방에 붙이러 나갈 것입니다. 늦어도 유정(6시 무렵)에는 돌아오겠지만 그 전에 관군이 들이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부루형을 지켜주실 분이 있습니까?"
협객이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단 관군이 없을 때만 그렇다.
가게 안에 모인 스물댓명 협객들의 얼굴은 약속이나 한듯이 흙빛이 되었다. 우리 주변에 병풍처럼 늘어섰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채 뒷걸음질 쳐대니 순식간에 사방이 썰렁해졌다. 그 한심한 꼴에 누루씨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런 자들이 협객이라면서 내 가게에 찾아왔다니! 강호의 의리와 도덕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말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나로 말하자면 한탄이고 뭐고 할거없이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항 속의 붕어처럼 입만 뻐금대고 눈만 껌벅이며 이쪽저쪽 둘러보는데, 갑자기 술집 문이 쩌억 열리며 한줄기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이름높은 이름없는 칼잡이(高名無名劍客) 형이 이 시간에 여기 오시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외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거요?"
키로 말하자면 문설주에 머리가 닿을듯 하니 적어도 일곱 자요, 덩치로 말하자면 양어깨가 문에 부딪힐 정도니 곰(熊)과도 같았다. 근육이 산처럼 솟아 돌덩이처럼 단단한 몸에 검은색 가죽 저고리를 걸치고 강철 같은 두 주먹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었다. 두툼한 흰색 머릿수건 사이로는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삐죽댔고 뺨에는 제멋대로 자란 구레나룻 수염이 뻗쳐섰는데 얼굴은 잘 그을린 구릿빛이요, 광대뼈는 화산처럼 튀어나오고 코는 둥글넙적하고 입은 메기처럼 컸으며 푸른빛 감도는 눈은 마치 샛별과도 같았다.
그 젊은이는 걸걸씨족(傑傑氏族) 몰찬(頭鑽)의 3대손으로 이름은 나모(我募)라 했다.
몰찬은 삼만 수군(水軍)을 이끌고 남쪽바다의 수적(水賊)을 소탕하고 든든한 진(南海鎭)을 세워 달딸과 왜와 류큐(琉球)를 잇는 바닷길(海路)을 넓힌 바다의 영웅이요, 창심권(瘡心拳)이라 불리우는 한가지 주먹질(拳術)을 창안한 주먹쟁이(拳士)이기도 했다.
범의 새끼는 범이요 독수리 알은 독수리가 되듯이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나모는 기이한 풍모만큼이나 남다른 힘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에 불과하나 칼질과 주먹질을 배우는데 뼈와 근육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니 능히 만명을 대적할 장삿감으로 여겨졌다. 허나 그 자신은 벼슬길에 큰 미련이 없는지 한가로이 협객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
타고난 사람됨이 시원시원한데다 꾸밈없이 솔직하니 친구로 사귀기에 모자람이 없는 호인(好人)이었다. 언젠가 그가 청한 글을 닦아준 것을 계기로 우리 둘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으니, 비록 내 나이가 한살 위긴 하지만 서로 말을 놓고 지내며 곧잘 술잔을 기울였다.
"이런이런, 부루와 둘이서 역모(逆謀)라도 꾸미는게요? 거 무슨 글인지 나도 좀 봅시다."
나모는 여유롭고 친근한 웃음을 흘리면서 두루마리의 글을 읽어내렸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서 웃음끼가 싹 가시더니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니, 이럴수가. 이 글을 정녕 칼잡이 형이 썼단 말이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난감한 순간이었다. 칼잡이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나를 가르켰다.
"제 천한 머리로 어찌 그런 귀한 문장을 써내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글을 닦아달라 청했을 뿐이지, 실은 부루형이 쓴 것이외다. 하지만 부루형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제 이름으로 대신했을 뿐입니다."
나모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바닥이 꺼져라 온몸을 내던지며 나와 칼잡이를 향해 넙죽 큰절을 올리니,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해부루. 내 자네의 높은 글솜씨를 미처 몰라봐서 미안하기 그지없네. 칼잡이 형님. 형님의 높은 뜻을 미처 몰라뵈었으니 부끄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이 어리석고 천한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어서 일어서게, 나모."
보다 못한 내가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몸 전체가 쇳덩이가 된 양 요지부동이었다. 이맛팍이 깨져라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저나 부루형에게 사죄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대신 나모형에게 작은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칼잡이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모는 두 눈을 빛내며 일어섰다.
"저는 부루형이 쓴 글을 저잣거리에 붙이려 합니다. 제가 돌아오기 전에 관군이 들이닥쳐 부루형을 해꼬지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올때까지 부루형을 지켜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맡겨 주십시오. 하지만 칼잡이 형님, 일단 부루만이라도 일찌감치 성 밖으로 피신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딴에는 머리를 굴려서 내놓은 꾀였으나 칼잡이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큰 놀이를 앞두고 성벽 안팎의 경비가 한층 삼엄해졌습니다. 부루형은 무술이라곤 전혀 모르는 몸이니 어찌 위험을 무릅쓸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지키느니만 못합니다."
"어이쿠, 내 그 사실을 까먹고 있었구나.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네."
나모는 이마를 탁 치며 내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무술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나 부끄러운 일일 줄이야 이전엔 미처 생각치도 못했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그의 사과를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우니, 나모는 민망하단 듯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칼잡이와 하던 말을 계속했다.
"허나 여기서 관군들에게 포위당하면 아예 성 밖으로 나갈 길이 아예 막히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관군이 여기 오면 자연히 성 밖으로 나갈 길이 열릴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와 나모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니 칼잡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야겠으니 부루형과 나모형은 잘 들어 주십시오. 절 돕는다면 두 분 다 관군에게 쫓기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추적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부루형은 정녕 이 글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나모형은 저와 부루형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이미 드린 글을 어찌 되돌려 받겠습니까.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내가 서슴치 않고 말하니 나모 역시 주저하지 않았다.
"제 나이 어리긴 해도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줄 압니다. 옳은 일을 하는데 두려울 것은 무엇이고 겁낼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모가 자신의 뜻을 확실히 정했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그 마음이 바뀔 리야 없었다. 그는 그런 사내였다. 칼잡이는 나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나를 쳐다봤다.
"그럼 부루형을 부탁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제 목숨을 걸고 부루를 지키겠습니다!"
"나모형의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행여나 형세가 불리하거든 관군에게 항복하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말에 놀란 나모가 그렇게 묻자, 칼잡이는 침착하게 답했다.
"목숨을 거는 사람은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나모형과 부루형이 어디에 갇히든 내가 목숨을 걸고 구해낼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어찌 그 말씀을 의심하겠습니까? 오로지 칼잡이 형님께서 이르신대로 따르겠습니다"
나모가 감격에 겨워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그러나 칼잡이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따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
그것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칼잡이 옆에 바짝 붙어선 나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자신없는 혼잣말도,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짧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여느 때나 다름없는 얼굴과 언제나의 말투로 되돌아갔다.
"주인어른. 이 글을 큰 종이로 쉰 장 가량 뽑아(出力:Printing) 주시겠습니까?"
"누구 말씀이라고 마다하겠습니까. 여보게, 배씨. 제일 좋은 종이를 골라 쉬흔 장을 뽑아오게."
배씨 노인이 두루마리 받아들고 부리나케 달려가자, 누루씨는 아직껏 엉거주춤 서 있는 다른 협객들을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 술버러지, 밥버러지 같은 썩은 협객들아. 내 가게에서 더러운 냄새 풍기지 말고 어서 꺼지지 못할꼬? 여봐라, 당장 저 놈들을 하나 남기지 말고 내쫓아라!"
여덟 팔자 수염이 올올이 곤두서도록 성을 내며 소리소리 질러대니 종업원들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사람들을 내쫓았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니 가게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남아 있는 손님이라곤 나와 칼잡이, 나모가 전부였다.
"주인어르신도 관군들에게 해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미리 몸을 피하시는게 어떠신지요?"
칼잡이가 그렇게 이르자 누루씨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기왕지사 일의 시작을 봤으면 끝까지 봐야 속이 후련하지 않겠습니까. 이 늙은 몸이 스스로 청하는 위험이니 대협께선 부디 괘념치 마십시오."
누루씨의 말을 들은 칼잡이는 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득 채운 술잔을 돌렸다.
"저처럼 못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부루형. 그리고 나모형. 우리 함께 잔을 비웁시다."
돌이켜 보면, 당시 칼잡이의 말을 믿을 이유라곤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출신도 몰랐다. 협객일지도 모르지만 관군의 밀정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제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관군들을 맞아 싸우긴커녕 제 한 목숨 살리기 위해 똥줄 빠지게 내뺄 수도 있었다. 나와 나모를 꽁꽁 묶어 관군에 넘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목석보다 딱딱하고 칼날보다 차가운 말투가 믿음직해서가 아니었다. 겨울 바다처럼 고요하고 가을 하늘처럼 평온한 눈빛이 미더워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마음을 믿었을 뿐이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면 그만이지, 다른 것을 따져 무엇하랴!
우리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칼잡이는 잔을 거꾸로 내려놓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부루형, 성에서 나가기 전에 집을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비와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놔 두십시오. 될 수 있으면 혼자 들 수 있는 정도의 짐만 챙기십시오. 나모형도 부루형과 함께 가서 집을 정리하고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당장 가도록 하겠습니다."
"유정까지는 여기로 돌아와 주십시오. 그리고 나모형, 지금 술집에서 쫓겨난 협객들 중에는 관군의 밀정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제 관군이 부루형을 잡으러 올지 모를 일이니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모는 호탕하게 답했고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배씨 노인이 종이뭉치(大字報)를 한아름 뽑아오니, 칼잡이는 그것을 받아들고 술집 밖 큰길로 나아갔다. 나는 나모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라 해 봐야 한 칸짜리 하숙방이고 가구라 해 봤자 책상과 옷장이 전부였다. 가져가지 않을 짐을 한쪽에 정리하고 돈을 전대에 챙겨넣고 옷가지 몇 벌을 보따리에 싸는데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집주인에게 석달치 하숙비에 달하는 돈과 함께 고향의 외삼촌네 주소를 일러 주었다.
"여긴 제 고향 집인데, 나머지 짐을 이곳으로 부쳐 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게. 내 상하지 않도록 고이 싸서 자네 외삼촌 집으로 부쳐줌세. 그런데 친구와 같이 이사할 모양인가 보이?"
나이 지긋한 집주인 할머니가 언제나처럼 서글서글한 웃음을 띄우며 그리 물으니, 나는 궁색한대로 말을 지어냈다.
"아닙니다,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온누리를 돌아다니며 노닐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만 이내 웃음띈 얼굴로 돌아갔다.
"그려그려, 잘 생각했네, 젊은이. 사내 대장부라면 그까짓 관직이나 기다리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게 아니라네. 젊을 적엔 탁 트인 벌판을 누비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게 최고야, 최고!"
"암은요. 할머님 말씀이 맞습니다."
나모는 할머니 말에 맞장구를 쳐 댔다. 할머니는 나와 나모의 손을 번갈아 잡으며 이렇게 당부했다.
"여행을 다닐 때는 부디 몸조심하게나. 조심, 또 조심해야 하네. 그리고 여행을 마치는대로 돌아오게나. 자네가 온다면 다시 방을 마련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머니. 꼭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외삼촌 집에 짐을 보내는데 이리 많은 돈을 줄 필요가 무에 있겠나. 다시 가져가게나."
집주인 할머니는 다시 돈을 돌려주려 했지만 나는 부득불 거절했다.
"제 마음이거니 생각하고 받아 주십시오. 그럼 다시 뵐 때까지 할머니도 몸 조심하십시오."
나는 할머니 손에 다시 돈을 쥐어주고는 그 집을 떠났다. 지난 3년간 지내며 나름대로 정붙인 집을 떠나려니, 맛난 밥을 지어주던 친절한 집주인 할머니와 작별흘 하려니, 웬지 서운한 마음이 일어났다.
길거리를 꽉 메운 인파를 헤치고 꾀꼬리 술집으로 돌아오니 시계는 마악 유시 정각(오후 5시)을 가르키고 있었다. 누루씨는 술집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지, 장부를 정리하고 종업원과 기생들에게 남은 임금(賃金)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렇게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용케 우리가 온 것을 알고 배씨 노인을 시켜 술 한동이를 내줬다. 우리는 칼잡이가 즐겨 앉는 구석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사발 가득 술을 따랐다.
방금 전까지 여기서 일하던 사람들이 짐보따리 싸매고 하나 둘씩 떠나는 모습을 보노라니 문득 가슴이 무너질 듯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제는 천지 사방을 떠돌며 뻥 뚫린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거친 땅을 방바닥 삼아 지내야 하는 도망자 신세를 약속받은 처지였다. 따뜻한 구들방에 책상다리 하고 앉아 편안히 글을 쓰고 유쾌히 술마시는 생활은 살아 생전 다시는 즐기지 못할런지도 몰랐다.
"뭘 그리 생각하나, 해부루."
"아니, 아닐세. 아무것도 아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글을 청한 칼잡이를 원망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글을 쓴 나 자신을 원망할 것인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겁나는 모양이구만. 하기사 힘없는 글쟁이가 힘있는 대신(權臣)을 농락하는 글을 썼으니 겁이 안날리가 없지."
비록 농담조로 건넨 말이었지만 아주 허튼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속내를 털어놨다.
"겁을 먹은건 아니야. 집도 절도 없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니 걱정이 될 뿐이지."
"봉양할 부모도 없고 먹여살릴 처자식도 없는 사람이 걱정은 무슨 걱정인가. 도망질이 아니라 유람이나 떠나는 셈 치게. 자, 어서 한잔 쭉 들이키게."
과연 옳은 말이었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하늘 아래 온누리를 돌아보는 삶도 나쁘지 않으리라, 또한 미더운 길동무가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랴.  막걸리 한사발을 쭈욱 들이키니 불안함이 가시고 걱정이 씻겨내렸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서너 잔을 비웠을 무렵이었다. 문 밖에서 요란스레 발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서른 명 남짓한 군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이들은 잿빛(灰色) 전포를 두르고 잿빛 투구를 쓰고 잿빛 갑옷을 입고 잿빛 가죽신을 신었으니, 오른뿔한 날범의 손발이나 다름없다는 서울(皇都) 동부호위군(東部護衛軍)의 병사들이었다. 나모는 빈 사발을 뒤집어 엎으며 중얼거렸다.
"날범의 개들이 벌써 몰려왔군."
군졸들은 세 갈래로 흩어져 더러는 앞문을 막고 더러는 뒷문을 막고 나머지는 나와 나모를 빙 둘러싸듯 했다. 누루씨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뛰쳐나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서울을 지키는 병사들이 술집에 짖쳐들어와 이 무슨 행패냐? 당장 나가지 못하겠느냐?"
그 때, 허리에는 화려한 보검을 차고 머리에는 은빛 날개달린 투구를 쓴 젊은 장수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몸집은 호리호리하고 턱은 뾰족하고 콧대는 오똑한데 얇은 입술에는 교만함이 서리고 째진 눈가에는 잔혹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목이 부러져라 힘을 주며 누루씨에게 호통을 쳤다.
"너는 어떻게 늙은 놈이길래 감히 동부호위군의 군사들에게 이래라 저래랴 명하는 게냐!"
그는 동부호위군의 부위(副尉) 을소(乙牛)라 하는데, 바른말 하는 선비를 잡아 가두고 옳은일 하는 협객을 잡아 족치는 일로 악명을 떨친 자였다. 또한 날범과 먼 인척지간이란 사실을 내세우며 오만가지 횡포를 부려대니 머리가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미워했다.
"댁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나이 지긋한 분에게 예의도 없이 구는 거요?"
나모가 눈을 부릅뜨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으나 을소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네까짓 놈이 나를 훈계하려는 게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그러더니 주먹으로 탁자를 쾅 소리가 나게 내리치며 을렀다.
"자, 괜한 소리 말고 내가 묻는 말에 바른대로 답하겠느냐? 아니면 이대로 끌려가겠느냐?"
"그래, 부위께선 뭘 알고 싶으신 게요?"
내가 마지못해 그렇게 묻자 을소가 품에서 한 권의 두루마리를 꺼내서 펼치는데, 화면에는 칼잡이의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다.
"너희들은 이 칼잡이란 놈을 아느냐?"
"이 자는 뭐요? 우린 모르는 사람이외다."
나모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답했으나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몸을 움찔했다. 을소는 아첨과 뇌물로 자리를 얻은 관리답게 눈치빠른 자였으니, 그걸 놓칠리가 없었다. 그는 오른손을 칼자루 위에 올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이 놈은 하늘 아래 으뜸가는 충신(天下第一忠臣)이신 오른뿔한 날범님을 중상 모략하는 글을 온 서울에 써붙이고 다녔다. 마땅히 국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니, 이 칼잡이란 놈을 감싸거나 감춰주는 사람이 있으면 역시 벌을 피하지 못하리라."
"아, 글쎄 우린 전혀 모르는 사람이올시다. 다른데 가서 찾아 보시오." 나모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렇다면 이 글쟁이(書生)는 왜 그리 놀라는가? 혹시 자네는 해씨족의 부루라는 글쟁이가 아닌가? "
을소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내게로 향했다. 태연함을 가장하여 부드럽게 둘러대려 했으나 마음만 앞서니 얼굴은 자꾸만 일그러지고 말문은 도무지 열리지가 않았다.
"그, 그렇습니다만?" 나는 겨우 더듬거리며 말했다.
"해부루, 너는 일찌기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거리의 무뢰배들을 선동하고 다닌다 들었다. 칼잡이란 놈이 써붙이고 다닌 글에서도 먹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걸 보아하니 네가 대신 써준 것이 아니더냐? 사실대로 말하렸다."
나를 벼슬이나 탐내는 소인배로 만든 것은 지독한 모욕이요, 뜻있는 협객들을 거리의 무뢰배로 모는 것은 비열한 말장난이었다. 이쯤 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참을 길이 없었다.
"내가 나랏일 맡기를 원한 것은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돌보기 위함이 아니요, 나랏님의 명을 받들어 세상 사람들을 돌보기를 원했을 뿐이외다. 협객들과 어울려 다닌 것은 그들이 품은 뜻이 나와 같기 때문이요, 그들을 앞세워 나쁜 일을 꾀하기 위함이 아니외다. 그대처럼 나라의 군사를 이끄는 막중한 지위에 오른 자는 마땅히 나라와 임금과 인민을 지키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요. 헌데 나랏님께 충성을 바치긴커녕 간신(奸臣)에게 꼬리치며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데 앞장서니, 그대야말로 국법으로 심판받아 마땅하외다!"
"이 글쟁이가 뚫린 입으로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을소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보검을 뽑아드니 나모 역시 주먹을 쥐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악 싸움판이 벌어질려는 찰나,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2009/03/14 01:05 2009/03/14 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