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하늘을 더럽히고 있네, 페터. 우린 천국에서 전쟁을 하고 있단 말일세."
- 한스 폰 함머, [Enemy Ace: War in Heaven] 중에서.

1964년, DC 코믹스의 스토리 작가 로버트 카니거와 만화가 죠 쿠버트는 이색적인 만화를 내놓습니다. 그 이름은 [적의 에이스 Enemy Ace]. 1차 대전 당시 붉은색 포커 삼엽기를 조종하며 조국 독일을 위해 연합군에 대항해 싸운 '지옥의 망치 Hammer of Hell', 리트마이스터(rittmeister: 편대장) 한스 폰 함머 남작의 활약을 그린 전쟁 만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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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간지나는 사내!

붉은 포커 삼엽기,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한스 폰 함머라는 캐릭터는 실존했던 독일의 전쟁 영웅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는 함머 가의 고성에서 느긋한 생활을 즐기며 인근 숲에 사는 한 마리 늑대와 함께 사냥을 즐기지만, 포커 삼엽기를 몰고 하늘로 올라가면 프랑스와 영국의 에이스들과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1대 1의 대결을 펼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한스 폰 함머는 순식간에 안티 히어로의 대명사가 되어 수많은 골수 팬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원작자인 카니거는 이런 회상을 하기도 했죠.

"... 상업적으론 실패했지만 예술적으론 성공을 거둔 만화죠.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저는 한스 폰 함머의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곤 합니다. 닐(나중에 Enemy Ace 시리즈의 작화에 참가한 만화가 닐 아담스)이 말하기를, 유럽인들은 [Enemy Ace]에 완전히 홀렸다더군요. 프랑스에선 매끌매끌한 컬러 커버를 씌운 두꺼운 책으로 나오기도 했답니다. 제목은 [붉은 남작 Le Baron Rouge]이었다는군요."
- 100 years of comic books에서 발췌

그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 2001년, 또다시 새로운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그 제목은 [적의 에이스: 천국의 전쟁 Enemy Ace: War in heaven]. 정말 오랫동안, 한스 폰 함머 남작의 용자(容姿)를 보고 싶어서 손톱만 물어뜯던 끝에, 드디어 그 책을 사고야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근 30년만에 복귀한 한스 폰 함머의 이야기, [War in heaven]은 어떤 이야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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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 1942년 4월,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 1차대전 당시 플랜더즈 상공에서 적기 100대를 격추시켰던 전쟁 영웅 한스 폰 함머가 은둔하고 있는 [함머 성]에 한 사람의 손님이 찾아온다. 그는 한스의 옛 전우이자 루프트바페의 장교인 페터 스탈슈미츠였다. 페터는 한스에게 자신과 함께 러시아로 가서 싸우자고 권하지만, 한스는 이미 자신의 나이가 마흔 여섯 살이나 되었다면서 거절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예전에 저 숲에 살았던 늑대가 기억 나나? 어쩌면 그건 실존하는 늑대가 아니라 나 자신의 투쟁 본능이 표출된 건지도 몰라……."

그러자 페터는 30년대에 나치를 비판했던 한스를 보호해 준 루프트바페의 동지들을 위해서라도, 러시아 군에게 형편없이 당하는 젊은 조종사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부디 전장으로 돌아와 달라고 설득한다. 한스 폰 함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몇 달 뒤, 소령 계급장을 단 한스 폰 함머는 붉은색으로 칠한 BF-109를 몰고 동부 전선으로 간다. 그는 페터 스탈슈미츠와 함께 비행 편대를 이끌며 레닌그라드 상공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같은 부대의 장교이자 나치 광신자인 요아힘 엥겔스와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다.
43년 1월의 어느날, 한스는 63대째의 격추를 기록했으니 베를린으로 와서 기사십자장을 받으라는 전문을 불태워 버린다. 그는 '오스트리아인 하사'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엥겔스는 즉시 게쉬타포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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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한스는 자신의 편대를 이끌고 출격한다. 소련군과 싸우던 중에, 탈출하려던 적군이 그의 BF-109 기의 프로펠러에 정면으로 충돌해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프로펠러가 부서진 한스의 BF-109는 레닌그라드로 추락한다.
거기서 한스는 독일군의 탱크에 화염병을 던지다가 값없이 죽어가는 소년병을 목격하고, 살기 위해서 시체를 뜯어먹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다가 소련병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려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한 마리 검은 늑대가 나타나 그를 구하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잠시 후, 한스는 자신의 눈앞에 널부러진 소련병의 시체를 내려다 보면서 짤막한 탄식을 내뱉는다.

'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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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1945년, 독일 아우그스부르크 상공. 대령으로 진급한 한스 폰 함머는 메사슈미츠 Me 262를 몰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폭격하는 미군의 B-17기를 향해 공대공 로켓을 발사하고 기관총을 쏜다.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돌아간 비행 편대의 장교들에게 주어진 것은 한 그릇의 고양이 스튜였다.
며칠 뒤, 방공망을 뚫고 나타난 두 기의 스핏파이어가 활주로의 프롭 전투기를 인정사정없이 박살낸다. 스핏파이어 편대가 사라진 뒤에, 한스는 이렇게 뇌까린다.

'우리가 하는 짓이 정확하게 어떤 건 줄 아나? 미국인들과 우리는 매일같이 비행기에 올라타서 가능한 하늘 높이 올라가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까지, 천국의 문턱까지 말이야. 그리고 우린 서로를 죽이려고 들지. 우린 하늘을 더럽히고 있네, 페터. 우린 천국에서 전쟁을 하고 있단 말일세…'

얼마 뒤, 한스는 적기를 요격하던 중에 조종이 미숙한 아군기와 충돌하는 바람에 비행기를 버리고 탈출한다. 그런데 한스의 낙하산이 떨어진 곳은 다카우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목불인견의 참상을 목도한 한스는 더이상 히틀러를 위해, 제 3제국을 위해 싸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는 비행장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총통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스를 죽이려 하는 나치 광신자 엥겔스는 페터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페터는 한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우리 여인들과 아이들을, 우리 동포들을 봤다네. 폭격으로 평평해진 집과 거리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드레스덴과 함부르크, 쾰른에서. 베를린의 괴물이 살아있는 한, 절대 끝나지 않을 전쟁에서 버둥대다가 죽은 사람들을 말이야.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제트기같은 무기를 가진 내가 어떻게 그들보다 먼저 항복할 수 있겠나? 내가 숨쉬는 한,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나? 군인의 진정한 의무는 전우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지, 지도자나 이데올로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 순간, 공습 경보가 울린다. 한스는 총통을 위해서가 아닌, 조국을 위해서, 독일인을 위해서 붉은색 Me-262에 올라탄다. 하지만 격렬한 전투 도중, 페터는 적기로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고 전사한다. 분노에 휩싸인 '지옥의 망치' 한스 폰 함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적기를 사냥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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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는 크리스티앙 알라미. 1부에선 정교한 그림체로 독자의 혼을 사로잡고, 2부에선 여분의 선을 생략한 간결한 그림으로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책 뒤에는 부록으로 60년대의 오리지날 [Enemy Ace] 만화 일부가 실려 있기도 합니다.
미국 만화는 슈퍼 히어로물밖에 없다, 전쟁 만화의 달인은 소림원문뿐이다, [Enemy Ace: War in Heaven]은 이 모든 편견을 깨부수고도 남을만한 작품입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드높은 창공에서 투쟁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보고 싶으시다면, 놓쳐선 안 될 작품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오리지날 Enemy Ace는 두 권의 하드커버 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책들도 사 보고야 말 겁니다. Herr Oberst!

2007/06/04 00:59 2007/06/04 0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