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잡담 | 2005/03/25 21:58 | djhan
하나.

지난 22일 오전 9시 45분,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시던 친할아버님께서 마침내 세상에 별리를 고하시고 할머님께서 기다리시는 저세상으로 떠나 가셨다. 마치 꿈을 꾸듯이.

30년간 교직에 종사하신 분이시고, 중풍으로 마비된 손에 붓을 감아쥐어 글씨를 쓰고 시를 짓던 분이시고, '내가 죽으면 비석에 학생(學生 *)이라고 쓰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시던 분이시다.

밤 11시, 늦게 도착한 부산 침례병원의 장례식장의 신위(神位)에는 학생 대신에 처사(處士 *)라는 말이 자리잡았다. 처음엔 학생으로 적었으나 구름같이 모여든 제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처사로 바꿨다고 한다. 제자들이 고인을 사랑하고 높이 여기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님께서 생전에 써 두셨던 명정에는 학생이라고 적혀 있으니 이 기묘한 불일치를 어찌 받아들여야 좋단 말인가.

(* 학생 : 벼슬하지 못한 선비를 이르는 말)
(* 처사 : 스스로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한 선비를 이르는 말)

둘.

23일 오전 9시. '묵사마' 정모 의원을 친견했다.
"국회의원이란 것들이 나랏일은 하지 않고 지역구 유지들의 경조사나 챙기고 다니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라고 서릿발같은 호통을 퍼붓고 싶은 마음과 "묵사마, 묵사발이 된 기분이 어떠세요?" 라고 빈정대고 싶은 마음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갈랐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셋.

부고장은 돌리지 않았다. '고인의 뜻으로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엄청난 글귀가 적힌 쪽지로 부의함의 뚜껑을 막아 놓았다.
그러나 세상은 바야흐로 휴대폰의 시대였다.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부고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는 별로 대단한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앞서 말했듯이, 제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든 것이다. 그렇게 기술의 발전은 삶의 방법은 물론,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도 바꿔 놓고 있었다.

넷.

"30년간 이 분의 머리를 깎은 이발사입니다."

30년간 할아버님의 머리를 깎은 단골 이발사가 찾아와 절을 올렸다. 30년. 30년의 단골이라. 문득 나도 그런 단골을 만들고 싶어졌다.

다섯.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나는 저 짓은 못할 것 같아."

할아버님의 시신을 염습하는 걸 보며, 메뚜기 hansang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신문기사를 보아하니 염습사 - 장례지도사는 대학생 알바 종목이 아닌, 어엿한 전문직종인 모양이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직업은 가진 사람들은 과연 어떤 눈으로 삶을 바라볼까. 그 직업을 택하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섯.

나는 영정을 들고 다른 손주들은 관을 들었다. 나는 차에 타고 다른 사람들은 버스에 탔다. 우리는 산비탈을 타고 올라, 두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사람들이 줄을 지어 누워 있는 공원 묘지로 들어갔다.
24일 오전 10시 30분, 하늘은 푸른데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며 은빛의 눈보라를 불러 일으키니 산이 하얗게 끓어올랐다. 오전 11시, 하관 시간이 되기 전에 눈보라는 수그러들었지만 드문드문 진눈깨비가 이어진다 .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까치는 구슬피 울어댄다. 관을 내리고, 명정을 덮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고, 친지와 제자들이 번갈아 그 위를 오가며 흙을 단단히 다졌다. 사촌형 중의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식으로 묻었으면 [킬 빌]은 불가능했을 거야."

일곱.

할아버님의 삶은 대하 드라마를 비웃음거리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만주에서부터 부산까지 이어지는 삶을 녹음 테잎으로 기록하셨고, 나는 그것의 정당한 계승자가 되었다.

내 작은 바램이 있다면 이 테잎을 바탕으로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이다. 부글부글 요동치며 끓어올랐던 20세기 조선과 대한민국을 살았던 한국인의 삶, 할아버님의 삶을 글로써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것은 생전의 할아버님께 약속드렸듯이, 아마 필생의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님, 걱정 말고 편히 쉬세요. 할머님과 함께.
2005/03/25 21:58 2005/03/25 21:58

트랙백을 보내세요

트랙백 주소 :: http://djhan.ddanzimovie.com/trackback/189
  1. 현고학생부군신위?

    Tracked from 푸른마음의 세상사랑 2005/03/25 22:51

    장례식이라는 DJHAN님의 글을 보며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