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또 이북 얘기를 해야겠다.

하지만 먼저 다른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건 MD다.

MD는 어떻게 보면 CD와 카세트 플레이어의 사생아 같은 존재였다. 그건 사각형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광자기 디스크와 ATRAC 기술, 그리고 튐 방지 기술의 결합품이었다. MD 플레이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비쌌지만, 음악을 녹음하려면 그보다 더 엄청난 가격의 MD 레코더를 따로 사야만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에는 음질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집에선 우아하게 CD로 음악을 듣고, 따로 마음에 드는 곡을 편집해 테이프로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MD는 당시 수요층의 행동 패턴에 딱 맞는 제품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했던 세상은 MP3의 등장과 함께 몰락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CD를 구입하지 않는다. 음악은 음반점에서 구입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다운받는 거다. 하나의 음악 파일엔 ID3 태그로 노래 제목부터 앨범 자켓에 이르는 거의 모든 앨범 정보가 통째로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지하철에서 앨범 자켓을 커버 플로우 - 또는 그걸 비슷하게 흉내낸 인터페이스를 이용해서 - 슉슉 넘기며 음악을 듣는다. 할렐루야!

그리고 오디오는 이제 가정집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음악은 MP3 플레이어나 휴대폰으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이 되었다. 뭐, 나름대로 잘 된 일이다. 나도 어렸을 적, 우리 아버지가 거실에서 최대 볼륨으로 듣는 클래식 때문에 짜증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말이다.

둘.

몇 달 전, 디지털 교과서 시범사업 관련 설명회 겸 전시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누트 2였다. 왜냐하면 그게 그 자리에 참석한 단 하나뿐인 이북 리더기였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놀랍게도 타블렛 PC였다. 그것도 미 해병대에서나 씀직한 무식하게 단단한 타블렛 PC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교과부에서 요구한 스펙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전자칠판을 이용해 수업 내용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해 엄청나게 다양한 요구사항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교과서는 단순한 텍스트와 그림의 평면적 집합에서 벗어나, 텍스트와 그림과 동영상과 사운드는 물론 교사의 해설이 입체적으로 결합되는 형태로 변화할 것이다.

좋건 싫건, 우리 뒤의 세대는 이런 교과서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것은 결코 멀지 않은 가까운 미래다.

셋.

나는 이미 3년 전부터 중고 리브리에로 시작해 여러 개의 이북 리더기를 전전하다가 최근 들어 아이리버 스토리에 안착한 상태다. 투덜대고 주저하면서도 지르긴 계속 질렀다. 뭐가 어쨌든 탐나는 장난감이니까.
하지만 내 개인적인 욕구와, 앞으로의 미래는 전혀 다른 얘기다.

전자종이란 아이디어는 "사람들은 종이책으로 텍스트를 읽기를 즐긴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뭐, 확실히 내 윗연배 분들은 모니터보다는 종이책을 친숙하게 여긴다.

그런데 며칠 전, 회사 동료가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지난 추석 때 조카가 우리집에 며칠 놀러왔어요. 이 녀석이 컴퓨터는 저보다 훨씬 더 잘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책은 전혀 안 읽는 거에요! 그래서 몇 권 보라고 권했죠. 그랬더니 읽기는 읽는데...... 정말 부담스러워하면서 읽더라고요. 옆에서 얼핏 보기에도 '정말 힘들어하는구나'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실제로 10대, 아니, 20대만 하더라도 종이책보다는 웹에서 정보를 얻는 데 훨씬 더 익숙하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면 풀컬러 LCD 모니터에 웹브라우저를 띄우고, 글자 크기와 레이아웃을 마음대로 바꿔가며 지식인이나 위키피디아의 글을 읽는다. 정말 급한 건 트위터 친구들한테 물어볼 수도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이 필요하면 곳곳에 널려 있는 사진 게시판이나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된다. 재미거리가 필요하면 유조아나 문피아 연재난, 아니면 네이버나 다음 웹툰 페이지를 열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책보다 웹에 익숙한 젊은층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 아니,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라고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종이책과 비슷한 질감이나 느낌, 그런 감성적인 느낌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 문제는 감성적인 느낌이란 게, 틈새시장을 공략할 때나 유효한 키워드란 사실이다.
디지털 교과서를 보고 자란 세대가 등장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책읽기보다 웹질을 더 편리하게 여기는 현재의 소년 소녀들에게 '종이책과 비슷한 전자종이'라는 게 과연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을까?
글쎄, 기껏해야 '육포 맛이 나는 가죽'이란 느낌을 주는 게 고작이리라. 뭔가 좋은 것 같은데, 막상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는 그런 느낌 말이다.

텍스트를 읽는 방법은 이미 바뀌었다. 그리고 계속 바뀌고 있다.
종이책이 오롯이 그 형태를 유지한 채 전자종이를 탑재한 이북 전용 리더기로 넘어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예측이 들어맞을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어떤 미디어에 격변이 일어날 때에는, 그 포맷은 물론이고 그걸 즐기는 방법조차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할 것 같냐고? 그런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혜안을 가졌다면 내가 회사원 따위를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젠장!
2009/10/29 23:25 2009/10/29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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