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듣는 이름일 것이다. 이 사람에 관해 구글링을 해 보면 위키피디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와 있는 게 보인다. (위키백과: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년 ~ 1938년)는 이탈리아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아브루치의 페스카라에서 출생하였다. 카르두치의 영향을 받은 1880년 시집 <조춘(早春)>으로 인정받았다. 정력적인 작가로 시집 13권, 단편집 4권, 소설 8권, 극작 17편, 그 밖에 평론, 산문집 등이 있다. 1893년에 <죄없는 자>의 불역(佛譯)이 나와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1910년에 빚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조국 이탈리아의 참전을 주장하고 귀국, 그해 7월 의용군에 가담하여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그 이듬해 비행 중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종전 후 국제 연맹의 결정에 항의하여 피우메 시(市)를 점령하는 장거를 감행하였다. 1921년 동시를 자국군에 인계하고 귀국, 1924년 몬테 네보소공(公)으로 봉(封)하여져 파쇼 정부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1938년 가루다 호반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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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포스가 느껴지는 얼굴. 하지만 알고 보면 166cm의 루저!

흠, 시인이라. 얼굴 생김새부터 범상치 않긴 하군.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위대한 시인은 아니었던가 봐. 애꾸눈이 되면서까지 전쟁터에 나갔다니, 대단한 애국자긴 하네. 그래, 이거야말로 진정한 이태리 사람이지!
위키피디아의 인물 소개를 보고 받을 수 있는 인상은 아마 그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아, 덤으로 위키피디아의 [코르토 말테제] 항목에도 단눈치오의 이름이 실려 있다.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 중 하나인 [베네치아의 전설]에 실존 인물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확인해 본 결과, 확실히 '시인'이라고 자칭하는 인물이 잠깐 얼굴을 내밀기는 했다. 이 사람이 단눈치오일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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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전설] 중의 한 컷. 닮은 것 같기는 한데, 이름이 직접 언급되진 않는다

하지만 단눈치오가 이름을 떨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름다운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저 위의 약력에서 짧게 언급되는 "피우메 시 점령" 때문이다. 그는 전후의 혼란기를 틈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피우메 시로 진군해 들어가 그곳을 점령했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시인이 주도하는 공화국을 세웠다!
단눈치오의 이 엄청난 위업에 관해서는 [기네스북이 선정한 세계사의 대실수]라는 책에서 특별히 한 챕터를 할애하여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읽고 있노라면 경탄과, 경외와, 배꼽 잡고 떼굴떼굴 구르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솟구치는, 그런 글이다. 그런즉슨 이 즐거움을 어찌 혼자만 누리리요. 여기 실린 내용을 위주로 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단눈치오라는 인물에 대해서 널리 알리고자 하는 바이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 그는 한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악명 높은 오입쟁이이기도 했다. 시의 영감을 얻을 때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상한 방법을 동원했다. 우산을 펴놓고 그 뒤에 종이를 놓은 다음 깃펜으로 쓰질 않나, 사산아가 담긴 병을 서가에 올려놓고 있는 등, 그야말로 엽기적인 기행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이탈리아의 기성 제도에 충격을 주길 좋아했다. 그가 보기에 기성 제도는 조국의 진보에 해로울 뿐이었으니까.
그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비행기 조종사였고, 동시에 자동차 레이서이기도 했다. 일은 안 하고 취미 생활에만 열중하니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것도 당연지사. 그는 빚쟁이들의 등쌀을 피해 프랑스로 줄행랑쳐야만 했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이탈리아는 처음엔 중립을 선언했다. 연합국과 동맹국은 서로 이탈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리고 1915년,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탈리아의 참전을 열렬하게 주장했던 단눈치오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즉시 이탈리아로 귀국한 그는 의용군에 가담해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그 때 그의 나이 무려 52세! (보온 상수공, 그대도 늦지 않았소!)
나이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을 함부로 굴린 탓인지, 전쟁 중에 그는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단눈치오는 낭만적인 시인이었고 타고난 군인인 동시에…… 전형적인 이태리 싸나이였다.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등장인물들이 허수아비로 여겨질 정도로.
그는 화려한 망또를 휘날리며 양 이빨 사이에 단도를 물고 양손에는 권총을 든 채로 오스트리아 군의 참호로 돌진해 들어갔다. 부카리 만에서는 어뢰정을 몰고 오스트리아 함대 사이로 돌진해 적함을 격침시켰다.
1918년 8월 9일, 그 날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하늘에는 빨강, 하양, 녹색의 색종이가 휘날렸다. 그것은 이탈리아 공군 편대가 떨어트린 팜플렛이었는데 그 편대장이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였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시내에 떨어진 색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빈 시민들이여. 우리는 지금이라도 폭탄을 떨어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인사를 보낸다'

아마도 단눈치오에게 있어서 전쟁은 사나이의 로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가장 적합한 시공간이었으리라. 실제로 그는 "전쟁이란 건 장군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글쎄,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시인들한테 맡길 순 없는 노릇이잖아?

 1918년, 참혹했던 전쟁이 끝났다.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는 단눈치오에게 크나큰 좌절을 안겨줄 따름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신문에 이름이 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기 과시욕에 충만한 인간이었으니까.
단눈치오는 열심히 탐색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또 다른 전쟁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사냥감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피우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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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메 지도 - 아드리아해에 접한 항구 도시란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피우메는 오늘날 리예카라 불리는 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다. 하지만 1차 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육지와 아드리아 해를 잇는 항구였고 이탈리이아와의 접경 지대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많은 이탈리아 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피우메를 집어삼키기 위해 무진장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5년의 참전 협약에서도, 1918년에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맺은 휴전 조약에서도, 피우메의 소유권은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비록 이탈리아 군대가 진주하긴 했지만 연합군의 일원으로 영국군, 프랑스군과 함께 진주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탈리아인들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우리가 피 흘려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다니, 이런 병신 같은 정치가들을 봤나! 그것이 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리라.

단눈치오는 이런 분위기를 재빨리 간파했다. 그리고 "피우메는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만일 그가 정치가였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 걸로 끝났으리라. 하지만 그는 시인이었다. 낭만적이면서도 애국적이고, 바이런처럼 행동할 줄 아는, 그러나 반쯤 맛이 간 시인…… 그리고 그는 움직였다. 완전 무장한 2,000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피우메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 전, 붉은 셔츠단과 함께 나폴리로 진군한 가리발디를 방불케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이탈리아 정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사실 이탈리아 정부는 피우메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당시 진행 중이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참전 댓가로 피우메를 얻기 위해 외교적으로 무진장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겨우 일이 잘 되려는 참에, 단눈치오가 대형 사고를 친 거다. 감히 연합군이 점령하고 있는 도시로 쳐들어 가다니! 이 무모한 도발은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공든 탑이 통째로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피우메 주둔군 사령관인 피탈루가 장군에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단눈치오와 그 추종자들이 나타나면 발포하라!"

1919년 9월 12일, 드디어 단눈치오가 피우메에 입성했다. 그 장면은 필름에 담겨 이탈리아 전역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필름이 아직껏 남아 있다면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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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눈치오를 환영하는 피우메 시민들의 사진 (이 뒤에 벌어질 일은 미처 상상도 못한 채)

영국 주둔군이나 프랑스 주둔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갈 몸, 공연한 싸움에 휘말릴 필요 없이 적당히 물러서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피탈루가 장군의 이탈리아 군의 사정은 달랐다. 이미 발포 명령도 받았겠다, 호락호락 길을 내줄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눈치오는 낭만적이면서 애국적인 시인인 동시에…… 쇼맨쉽으로 똘똘 뭉친 연기자였다.
그는 피탈루가를 찾아가 의용군에 합류할 것을 종용했다. 피탈루가 장군은 거절했다. 그러자 단눈치오는 외투를 벗어제치고 가슴팍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을 보여주며 당당하게 외쳤다.

"장군,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나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뿐이오!"

그것은 칸느 영화제 주연상이 아깝지 않을 완벽한 연기였다. 피우메 시민들은 좋아라 날뛰었다. 이탈리아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단눈치오의 의용군에 합류했고, 합류하지 않은 군인들은 다른 연합군과 함께 피우메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피탈루가 장군이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단눈치오는 피우메에 자신을 '영도자(Duce:두체)'로 하는 독립 정부를 세웠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리고 피우메를 이탈리아 정부에 양도하는 데 성공했다면, 단눈치오는 아마도 가리발디 못지 않은 영웅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 우라지게 불행한 일이지만 - 이 뒤에 이어진 것은 영웅적 서사시가 아니라 싸구려 희가극이었다.

단눈치오의 정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국제적이면서도 급진적이었다. 정부 구성원은 미국 저널리스트, 시인, 벨기에 작가, 이태리 사업가, 노조지도자, 무정부주의자, 군인, 기타 등등, 중국집 짬뽕이 무색하리만치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당대 최고의 급진주의적인 정부였던 소비에트 연방 정부도 이보다 더 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어쨌든 피우메 정부 조직은 나폴레옹 헌장에 기초하고 있었고, 경찰 조직도 겉보기에는 그럴싸했다.
문제는 그 뒷면이었다.
단눈치오는 멋지고 낭만적인 말투로 피우메를 "미덕의 공화국"이라고 선언했지만, 현실 속의 피우메는 그렇게 멋들어지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은 도시였다. 굳이 말하자면, 뭐랄까, 소돔과 고모라에 가까운 도시였다. 당시 떠도는 말에 따르면 '피우메는 매음굴, 범죄자와 창녀를 위한 탈출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수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피우메로 몰려들었다. 겉으로는 위대한 영도자, 단눈치오 밑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피우메에서 행한 것은 미덕의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1) 자유 연애 2) 술 3) 담배 4) 마약이었다.
단눈치오의 추종자를 자청하는 젊은이들은 검은 셔츠를 입었다. 나중에 뭇솔리니가 베껴 먹는 그 검은 셔츠 말이다. 어깨에는 해골과 뼈가 그려진 기장을 달고 허리에는 단도를 찼다. 음, 이건 히틀러가 베꼈던가? 아무튼 그들은 그렇게 폼 나는 차림새를 하고 길거리를 행진하며 "에이아 에이아 알랄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단눈치오 왈, 아킬레스가 마차를 타고 말몰이를 할 때 그렇게 외쳤대나 뭐래나……

국제 사회는 격분했다.
한 무더기의 얼간이, 실업자, 불한당(및 알콜 중독자와 약쟁이)들을 데리고 영도자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단눈치오를 당장 피우메에서 쫓아내라면서 이탈리아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단눈치오는 단호하게 저항했다.

"위대한 시인 밀턴의 나라 영국은 시인이 다스리는 공화국을 절대로 폭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영국은 시인의 나라도 아니었고 신사의 나라도 아니었고 필요할 때면 과감히 폭력을 휘두르는 패권 국가였다. 단지 '미덕의 공화국'에 폭탄을 쏟아부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쨌든 한 관찰자는 당시 피우메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광란의 기간이었다. 술의 신 바쿠스가 지배했고, 사방에서 총 쏘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섹스의 교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단눈치오는 피우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 늦게까지 일하겠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에 그는 '릴리 드 몬트레소르'라는 술집 출신의 여가수와 질퍽하게 놀아나느라 바빴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는 위대한 영도자의 궁전에 몰래 들어가 아침이 되어서야 빠져나왔다고 한다.
영도자가 그 모양이니 추종자들이야 오죽하리오. 모두가 향락에 빠져들었고 도시의 행정은 엉망진창이 됐다. 행정부에선 돈을 마구잡이로 지출했다. 곧 식량이 떨어지고 물가가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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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도자 단눈치오의 전신상이 들어간 피우메의 우편엽서(1921년)

그쯤 되자 단눈치오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조치가 필요횄다. 그래서 구이도 켈레르가 이끄는 독립 부대가 나섰다. 그들의 별명은 '속옷도 안 입는 사람들' - 뭔가 깊은 뜻이 담긴 중의적인 표현이냐고? 천만의 말씀. 웃통을 홀랑 벗어던지고 길거리를 행진하는 전통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거다!
이들은 피우메의 공중 도덕을 향상시키기 위한 불침번을 자처했다고 한다. 뭐? 웃통도 까고 다니는 변태 새끼들이 공중 도덕을 운운했다고? 믿겨지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을 어쩌리오.
그러나 아무리 찌질해 보이는 변태들이라 할지라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대원칙까지 모르는 얼간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피우메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영도자의 개인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단눈치오는 몬트레소르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피아니스트인 루이사 바카라와 놀아나고 있었다. 감히 위대한 영도자의 거시기…… 아니,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다니! 요망한 암컷 같으니라고!

켈레르와 그의 부하들은 루이사가 없어져야 단눈치오가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정치가나 군인이라면 암살을 계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낭만적이면서도 애국적인 시인이자, 전쟁 영웅이자, 쇼맨쉽으로 똘똘 뭉친 연기자이자, 피우메의 영도자인 단눈치오의 부하들이었다. 즉, 그들 역시 전형적인 이태리 싸나이들이었다.
여자를 죽이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정치적 행동에도 낭만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사나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 그들은 루이사를 죽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단눈치오의 눈앞에서 화려한 축제를 열고, 축제 도중에 루이사를 납치해 멀리 떠나보내기로 했다. 이른바 [사랑의 축제] 프로젝트였다.
그 내용인즉슨 이러했다. 먼저 루이사를 포함한 피우메의 아름다운 여자를 전부 모아 나무로 만든 성에 가둬 놓는다. 음식과 돈, 그리고 꽃도 함께 넣어 둔다. 그리고 남자들이 떼지어 몰려가 그 성을 포위하고 여자(와 돈)을 쟁탈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단, 전투가 최고조에 달하기 직전에 루이사를 성에서 빼내 멀리 외국으로 보낸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황당한 계획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단눈치오가 이 얼빠진 축제를 개최하게 내버려 두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단눈치오는 역시 단눈치오였다. 그는 흔쾌히 축제 개최를 승인하고 직접 참가하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루이사 납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단눈치오가 갑자기 싫증을 내고 도중에 축제를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영도자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엔 다들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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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도자의 초상이 들어간 피우메 우표(1920)
좌우에 인쇄된 라틴어 문구 "HIC MANEBIMUS OPTIME"는
"우린 여기 즐겁게 머물리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과연!

제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일지라도 매일같이 반복되면 물리는 법이다. 술과 여자와 마약으로 뒤범벅이 된 얼빠진 일상을 뒤로 한 채 피우메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시민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선포되는 포고령에 신물을 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단눈치오는 음악에 대한 숭배를 선동하고 나섰다.

"위대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모양을 가진 신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신에 대한 찬가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는 살아 있는 신으로 떠받들어진 로마 황제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눈치오 자신은 165센티의 단신인데다가 대머리에 애꾸눈이었고 주먹코를 한 땅딸보였다. 그런 모습의 신을 상상하노라면 신앙심이 날아가기엔 충분하리라. 하물며 찬가라니! 그쯤 되면 다들 무신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어느 때인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단눈치오는 1만명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극장을 만들겠노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침묵만이 흘렀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의용군의 핵심 멤버들은 어젯밤의 과도한 술과 마약과 여자 때문에 잠을 처자느라 바빴다. 몇몇 그룹은 상인들에게서 보호세를 뜯어냈다. 부두에서 창녀촌을 경영하는 자들도 있었다. 경찰 조직은 이미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종말이 다가왔다.
1920년 11월, 이탈리아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라팔로에서 협정을 맺고, 피우메를 국제연맹의 관할하에 독립시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는 피우메로 들어가는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누가 보기에도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건 분명했다. 아무리 용감하고 훌륭한 군대라 할지라도 제복과 군화를 뜯어먹고 살 수는 없다. 하물며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의용군이야 오죽하리오. 그들의 기강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이태리 산적떼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고, 곳곳에서 탈영병이 속출했다.
그리고 12월 24일,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피우메 항구를 봉쇄하고 있던 이탈리아 해군 함대에서 포격을 가한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눈치오는 낭만적이면서 애국적인 시인인 동시에 쇼맨쉽이 뭔지 아는 연기자였고 위대한 영도자이기도 했다. 영도자는 도망칠 때도 당당해야 하는 법,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피우메 시민들은 내 위대한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글쎄, 그의 사상이 위대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단눈치오는 그 말을 남긴 채 피우메를 떠났다. 그리고 피우메 시민들은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물론 단눈치오의 위대한 사사상은 철저하게 배제된 정부였다.

아마 단눈치오 자신은 피우메 진공을 반쯤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그리고 반쯤은 재미삼아 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수한 애국주의에서 출발한 그의 행동은 위험천만한 파시스트인 무솔리니에게 정치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무솔리니는 단눈치오의 의용군을 베껴 '검은 셔츠단'을 창설했다. 그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머리엔 피마자 기름을 발라 넘기고, 로마식 경례를 하며, 정치적 반대파에겐 가차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1922년,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절대 권력을 잡고 이탈리아 왕국의 영도자(Duce)가 되었다.
그 때 단눈치오는 병상에 누운 채 꼼짝달짝 못하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이 있기 직전, 정체 모를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창문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여자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인 원한 때문인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정신적 지주인 단눈치오를 깍듯하게 예우해 줬다. 1924년에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는 단눈치오를 몬테네보소 공(Principe di Montenevoso)에 봉했다. 그 해에 이탈리아는 피우메를 공격해 함락하고 이탈리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1937년, 단눈치오는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의 학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위를 오래 누리기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다. 이듬해인 1938년, 단눈치오는 가르도네 리베라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비록 단눈치오가 무솔리니와 정치적 성향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에겐 권력욕이란 게 없었다. 그는 순수한 애국자였고, 순수하게 객관적인 시각에서 국제 정세를 보는 눈도 있었고, 나치 독일의 위험성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1933년, 그는 무솔리니에게 히틀러와 동맹을 맺지 말 것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1934년에는 히틀러를 풍자하는 팜플렛을 배포했고, 1937년에 무솔리니와 만났을 때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히틀러와의 동맹을 파기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듣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한참 뒤인 1944년에 이르러서야 "단눈치오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게 내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땐 모든 게 늦은 뒤였다. 1945년, 무솔리니는 공산주의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7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피우메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귀속되었다. 그 이후 유고 연방의 해체를 거쳐, 오늘날 피우메는 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 '리예카'가 되었다. 한때 그 도시에 단눈치오가 영도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진공은 낭만적 애국주의에 물든 사나이들이 펼친 유쾌한 에피소드로 남을 수 있었다. 비극적인 에피소드로 점철된 역사책 속에서 하나의 희가극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는 낭만이 끼어들 여지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의 피우메 진공은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당한 끝에, 두 번 다시 인용되어선 안 될 사건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단눈치오가 낭만적이면서도 애국적인 시인이자, 전쟁 영웅이자, 쇼맨쉽으로 똘똘 뭉친 연기자이자, 피우메의 영도자였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가 진정한 이태리 싸나이란 사실엔 전혀 변함이 없단 말이다!

- DJ.HAN -

2011/06/26 13:04 2011/06/26 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