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번째 두루마리(第一券)
때는 벚꽃임금(桜花女帝) 3년이었으니, 내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큰 뜻을 품고 서울(皇都)에 올라온지도 3년째였다.
첫 해에 보기좋게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를 위해 일할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자리(官職)는 주어지지 않았다. 관직의 숫자는 정해져 있건만 외척인 밝씨족(明氏族)이 득세하는 바람에 급제자의 등용이 미뤄지고 귀족 자제들에게 뒷길을 열어주는 게(蔭敍) 우선했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노라니 어느새 가진 돈이 바닥나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별 수 없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糊口之策) 사람들(世人)이 즐겨 읽는 소설(大衆小說)과 잡문(雜文)에 손대기 시작했다. 헌데 이것들이 뜻밖의 좋은 평(好評)을 들으며 날개돋친듯 팔려나가 먹고 사는 걱정일랑 깨끗이 사라졌다. 선비(士)로서 깨끗한 이름을 높이 세우진 못했을지언정 글쟁이(文人)로서 한 글자 씨족(氏族)의 이름과 두 글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기쁨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에 대한 아쉬움과 근심은 못내 지워지지 않았다. 틈만 나면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함께 술집(酒樓)에 모여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며 술잔을 나누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서울 거리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술집이 널려 있는데, 거개가 '하늘아래 으뜸가는 술집(天下第一樓)'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궐앞 큰길(朱雀大路)에서 이 간판을 찾기란 어렵잖은 일이건만 정녕 그 이름이 어울리는 술집은 어디에도 없다.
남쪽으로 쭈욱 뻗은 큰길을 지나 동쪽으로 꺾어지면 초라한 민가(民家)가 양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좁은 길이 보인다. 큰길가에선 뵈지도 않던 성벽(城壁)이 높다란 절벽처럼 다가오고 아래위를 오가는 병졸(兵卒)들이 아이들 장난감처럼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거기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꾀꼬리 술집(黃鳥酒樓)'이란 간판이 붙은 허름한 3층 누각이 눈에 들어온다.
겉보기는 초라할지언정 이곳의 술은 달콤하고 안주는 맛있는데다 값도 싸고 양도 풍성했다. 널찍하고 편안한 자리와 눈치빠른 종업원에 해시(亥時:저녁 9시) 이후에는 꾀꼬리같은 기녀(妓女)들의 춤과 노래(歌舞)를 보는 즐거움이 더해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곳 주인 누루씨(黃氏)은 젊은날 영웅이 되길 꿈꾸며 긴 창(長槍) 한자루를 들고 강호에 뛰어들었다 한다. 이름 높은 스승에게 창질(槍術)을 배우고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싸움(戰爭)에도 빠짐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창솜씨가 딸려 강호에 이름을 떨치지도 못하고 싸움에서 별다른 전공(戰功)을 세우지도 못했다. 종국에는 협객의 길을 포기하고 북쪽 연기나루(煙浦)에서 달딸(唐國)의 비단과 흰 금(白金)을 들여오는 사업을 시작했다. 창솜씨와 달리 장삿속은 여간네기가 아니었던지 십년도 되지 않아 십만금을 벌고 이십년째엔 백만금을 벌었다.
나이 육십이 되던 해, 그는 기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서울에 올라와 꾀꼬리 술집을 열었다. 젊은날 강호에 진 신세를 갚기 위해(報恩) 협객들에게 좋은 술과 맛난 밥을 싼 값에 팔겠노라 공언했다. 원체 협객이라 불리우는 무리는 실속없는 짓에 바빠 주머니 사정이 넉넉찮은지라 이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이름깨나 하는 협객도 단골이 되었으니, 누루씨가 강호에 품은 애틋한 정이 늦게나마 인정받은 셈이랄까.
나와 친구들은 이름값 못하는 술집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직 이곳, 꾀꼬리 술집만 찾았다. 이전부터 터를 잡은 협객들은 우릴 멀리하고 경계하는 눈치(敬遠視)였다. 본디 협객이란 글쟁이(書生)를 '썩은 글이나 쫓는 약해빠진 무리'라고 업신여기기 일쑤 아니던가.
하지만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튼 사람이 늘어났다. 개중엔 우리 글을 읽은 협객도 있었고, 우리에게 글을 부탁하는 협객도 있었다. 그렇게 한해를 넘기니 마침내 협객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즈음 칼잡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대로(前述) 그는 거의 매일같이 술집에 들렀다. 마시는 술은 대나무 막걸리, 양은 한 동이로 정해져 있었다. 오지 않는 날은 보름에 한 번 될까말까 했다.
그는 언제나 1층 구석 창가의 비좁은 탁자에 앉았다. 이전에는 모두들 피하던 자리다. 6년인가 7년 전에 어느 어리석은 협객이 그 자리에 앉아 독한 술 서른 동이를 비우며 주량(酒量)을 뽐내다 황천길로 갔기 때문이다(醉中夢死). 사람 죽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면 저주를 받는다는 미신을 철썩같이 믿어 의심찮는 협객들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나 칼잡이는 개의치 않았다.
싸구려 술만 즐기고 양도 적은 손님이라 꺼릴만도 하건만 술집 주인은 도리어 칼잡이를 반기는 눈치였다. 누루씨는 협객 시절 자신의 창잡이였던 배씨(李氏) 노인에게 칼잡이의 접대를 맡겼는데, 이는 퍽 높은 손님을 대접하는 예(禮)였다. 어쩌면 그는 칼잡이에게서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협객의 풍채와 모습(風貌)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허연 수염 길게 기른 배씨 노인 역시 칼잡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가 오면 눈짓으로 반기고, 술동이를 나르면서 손짓으로 반기고, 뒤로 물러서며 고갯짓으로 반겼다. 종업원의 우두머리 격인지라 술동이를 직접 나르는 수고로움은 피할 수도 있었지만 여간해선 그 일을 남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니 물쇠의 사건 직후, 칼잡이에게 맑은술(淸酒)을 강권했던 종업원이 배씨 노인에게 왼종일 꾸지람을 들은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듣다 지친 젊은이가 차라리 모가지를 시켜달라(解雇) 하소연할 정도였다.
술집 주인이나 배씨 노인의 파격적인 대우와는 달리, 거개의 협객들은 칼잡이를 썩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술 한동이 시켜놓고 찔금대는 꼴을 놓고 '계집애같다' 욕하고 밤새도록 말없이 앉아있는 꼴을 보고 '돌부처같다' 비아냥댔다.
나무나 돌인양(木石) 국으로 가만 있으니 칼잡이의 정체를 알 길은 막막했다. 씨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고 하는 일도 몰랐다. 나도느니 근거없는 소문이었다.
칼잡이가 암살집단(暗殺集團)의 고수(高手)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숨어 정의로운 협객의 목숨을 위협하는 암살집단은 전설(傳說)이나 괴담(怪談) 속의 존재다. 사람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객은 무리에서 떨어진 늑대처럼 밤길을 숨어 다니지, 칼잡이처럼 당당하게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강호의 협객들을 감시하기 위해 나라에서 파견한 솜씨좋은 첩자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첩자가 밤새도록 술만 퍼마시며 하릴없이 앉아만 있겠는가.
무공을 높이기 위해 자기 몸을 완전히 뜯어고친 고침이(改造人間)라거나, 늙지도 죽지도 않는(不老不死) 연단(煙丹)의 비술(秘術)을 터득한 도인(道人)이란 둥 하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 소문이 어찌나 그럴싸했던지 불로장생의 연단술을 가르쳐달라며 칼잡이 앞에 무릎꿇은 사람마저 있었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건 그는 개의치 않고 술만 마셨다. 소문은 소리없이 꼬리를 내렸고, 그에겐 협객도 암살자도 첩자도 도인도 아닌 칼잡이(劍客)란 호칭만이 남았다. 물쇠와의 사건 뒤로는 '간 큰 칼잡이(大膽劍客)'라 불리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이름없는 칼잡이(無名劍客)'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칼잡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겨울잠에 빠진 곰처럼 발톱을 숨기고 몸을 웅크리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겼다.
싸구려 술과 귀한 시간을 맞바꾸며 두 해를 보내는 사이, 열 네살이었던 벚꽃임금은 열 여섯이 되었다. 밝씨(明氏) 태후의 섭정(攝政)은 여전하니 외척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지고, 그 밑에서 떡고물을 얻어먹으려는 간신배가 넘쳐나니 조정(朝廷)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어질기로 이름높은 큰뿔한(太大角干:領議政) 미르함(龍喊)이 나랏일(國政)을 바로하고자 애썼으나 혼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커져만 갔다.
드높은 하늘에서 살별(妖星:彗星)이 달포 동안 뻗치고 달빛이 태미원(太微垣)을 범하니 참으로 상서롭지 못한 징조였다(주 1). 가까운 달딸(唐國)과 머나먼 왜국(倭國)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황야에선 마적(馬賊)이 산에선 산적(山賊)이 물에선 수적(水賊:海賊)이 극성을 부렸다.
힘있는 공후(公侯)는 어린 임금을 업신여겼고, 강호의 협객은 무능한 조정을 비웃었다. 힘없는 사람(人民)은 불안에 떨었고, 뜻있는 선비는 탄식만 거듭했다.
(주 1 : 달이나 행성이 태미원 담을 이루는 벼슬아치별이나 장군별에 다가가면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된다).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