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한국식' 무협 판타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도

 

<<칼잡이>>

 - 머리말

한 마리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 높이 나는 이유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다.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끈질기게 광활한 대지를 탐색하는 이유는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독수리가 냄새 나는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이란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날카롭게 소리지르며 매서운 발톱을 곧추세우고 지상으로 용맹하게 떨어져 내리는 모습만 보고, 독수리야말로 진정한 하늘의 왕자라고 지레짐작한다.
한 마리 표범이 깊은 숲 속 나무에 올라타 숨 죽이고 있는 이유는 한가로이 쉬기 위해서가 아니다. 삐죽한 이빨을 감춘 채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이유는 적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발치 아래 연약한 들짐승이 나타난 순간, 표범은 광포한 사냥꾼으로 돌변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범이 피에 굶주린 맹수란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처럼 의연한 자세만 놓고, 표범이야말로 진정한 숲의 왕자라고 착각한다.
한 사람의 칼잡이(劍客)가 칼을 든 이유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라 밝히는 자도 있고,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라 말하는 자도 있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라 주장하는 자도 있고, 인격을 닦기 위해서라 변명하는 자도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칼잡이의 칼이 오로지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이 얼마나 많은 피를 머금었을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칼잡이들이 내세운 허황되고 무가치한 명분에 요란한 박수갈채를 보내며 그들에게 영웅(英雄)이니 대협(大俠)이니 하는 야한 치장을 덧씌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전혀 달랐다.
그는 영웅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고 대협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구할 생각도 없었고 누군가를 구할 생각도 없었다. 나라를 위한다거나 인격을 닦는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칼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엔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협객(俠客)'이니 '검호(儉豪)'니 하는 칭호로 불리웠다. 하지만 그런 헛된 이름(虛名)은 얄팍한 검술과 녹슨 칼 한 자루에 의지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날뛰는 불한당에게나 어울리는 법이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오로지 하나, '칼잡이(劍客)'뿐이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산자락에 걸치고 새빨간 노을이 드리워지면, 그는 두루마기(道袍) 자락을 휘날리며 술집(酒樓)에 들어온다. 일층 맨 구석 후미진 자리까지 일직선으로 걸어가 정갈한 자세로 앉노라면 허연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늙은 종업원이 대나무 막걸리(竹林濁酒) 한 동이를 들고나와 그 앞에 내려놓는다. 손바닥만한 창문에서 쏟아지는 바스러진 별빛이 술안주요, 탁자 위에 흔들리는 가련한 불빛(電燈)이 말상대다.
만일 그가 술을 한 동이 이상 마셨다면 칼잡이로 불리는 대신 주정뱅이로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무인(武人)답게 자신을 절제할 줄 알았다. 온몸을 감싼 백옥처럼 하얀 두루마기로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내비쳤고 허리까지 늘어뜨린 흑단처럼 고운 머리카락으로 자유로운 기상을 드러냈다.
기나긴 머리카락은 앞이마를 따라 홀쭉한 뺨을 스쳐지나가며 가늘지만 힘있는 눈썹의 끝을 살짝 감추었다. 칠흑같은 어둠에 파묻힌 눈동자는 고상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지만, 한없는 무정(無情)함이 고여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은 술을 마셔도 뜨거워지지 않았고 연지처럼 새빨간 입술엔 아무런 표정도 담기지 않았으니, 그 끝에는 한줄기 서늘한 기운이 서렸다. 겉보기엔 스무살 젊은이로 여겨지나 자세히 뜯어보면 서른 해 남짓한 연륜이 느껴졌다.
양 손에 붉은색 가죽 수갑(手甲)을 차고 허리춤에 삼척 장검을 비끌어매어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지만 그걸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터럭만치도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가죽 수갑이나 상어껍질이 흉하게 벗겨진 칼집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칼자루만이 영롱한 주홍빛을 잃지 않았는데, 그 아래 숨겨진 칼이 이름난 명검(名劍)인지 이름없는 검(無名劍)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칼을 뽑아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큰강 남쪽(江南)의 '물쇠(水鐵)' 라는 이름난 협객이 서울(皇都)에 올라왔을 때의 일이다.
물쇠는 스무살이 되던 해에 꼬리터럭뫼(尾毛山)에 산채를 열고 사람들을 괴롭히던 산적(山賊) 서른댓 명을 혼자 힘으로 해치웠다. 서른 살에는 내물치(川水齒)의 싸움(戰爭)에서 장군주(丈軍主)가 이끄는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그 이름을 온누리(世上)에 떨쳤다. 그러나 조정에서 내리는 높은 관작도 마다하고 강호(江湖)에 나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표국(水鐵飄局)을 여니, 그를 따르는 사람만 삼백이요 물건(商品)을 맡기는 장사치(商人)는 삼천을 헤아리며 재산은 기백만에 이른다 했다. 그러나 자만하는 대신에 겸양할 줄 알고 벗을 사귀고 덕을 쌓을 줄도 아니, 풍류(風流)를 아는 높은 협객이라 할만 했다.
이젠 세월이 흘러 그 나이 예순이 다 되었건만 한 자루 '빛나는 큰 칼(閃光太刀)'을 쓰는 솜씨는 녹슬 줄을 모르니 남쪽에서 그를 당할 자는 여전히 열 손가락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서울에 올라오니 삽십년전 그와 손잡고 싸웠던 전우(戰友)들이 앞다투어 그를 찾은 것은 물론이요, 삼십년간 그와 실력을 겨루던 협객(俠客)들도 미움을 털고 반가이 맞이했다.
물쇠는 수십의 이름난 협객들과 높은 군인들에 둘러싸여 요란법석을 떨며 술집에 들어왔다. 칼잡이는 소리없이 들어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들이 수십 동이의 술과 백여 접시의 안주를 동내며 난리법석을 피우는 와중에, 칼잡이는 고고하게 앉아 달콤한 술맛을 조용히 음미했다.
한껏 술이 오르고 흥에 취한 물쇠는 합석한 사람들의 술값과 밥값을 모두 자신이 치르겠노라 호언했다. 협객들의 함성이 드높이 울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술집 안의 모든 탁자에  최고급 푸른잎술(靑葉淸酒)를 한동이씩 돌리겠노라 큰소리로 외치니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예 서까래를 뒤흔들 지경이었다.
사람이 앉은 탁자엔 푸른잎술 한동이가 빠짐없이 돌아갔다. 칼잡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술집 주인이나 종업원 중에 그가 대나무 막걸리만 마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나, 직접 돈을 내면서까지 술을 돌리라 한 물쇠의 뜻을 거스를 수야 없었다.
그러나 칼잡이는 난데없이 놓여진 술병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게 뭐요?"
칼잡이의 목소리는 방금 식은 쇳덩이마냥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고 뜻하지도 않은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순수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날 칼잡이에게 푸른잎술을 가져간 종업원은 술집에서 일한지 채 한달도 안된 새파란 젊은이였다. 노련한 종업원이었다면 싱긋 웃으면서 술동이를 슬쩍 탁자 밑으로 물렀을 것이다. 노회한 주인이었다면 술동이를 놔둔 채 말없이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는 그런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젊은이는 오로지 정직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물쇠 어르신(大人)께서 탁자마다 이 술을 한동이씩 돌리라 했습니다. 아까 듣지 못하셨습니까?"
칼잡이는 가볍게 머리를 젓더니 손을 들어 술동이를 종업원 쪽으로 물리며 이렇게 말했다.
"필요 없소. 가져 가시오."
그 짧은 말은 단순한 정직함에 복잡한 모순을 불러 일으켰다. 만일 술동이를 가져간다면 물쇠 어르신의 뜻을 거스르게 되니 이는 옳지 못함이오, 그렇다고 술동이를 그냥 놔둔다면 칼잡이의 뜻을 무시하는 셈이니 이 또한 바르지 못한 일이다. 혼란에 빠진 젊은이는 손을 쥐락펴락 고개를 들락날락 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뭐 하는 거요. 어서 치우시오."
칼잡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높아졌다. 비록 천장이 들썩거리거나 땅이 울릴 만큼 큰소리는 아니었으나 세상살이(世波)에 닳고 닳은 늙은 협객(老俠客) 물쇠의 귀를 자극하기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대체 무슨 소란인가?"
물쇠가 벌떡 일어나 그렇게 소리치자 칼잡이는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이 술동이를 치우라 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물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젊은이, 그 술은 내가 돌린 걸세. 부담갖지 말고 쭈욱 마시게나."
그는 칼잡이가 공짜 술에 부담을 느껴서 그랬으리라 넘겨짚은 모양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칼잡이가  대나무 막걸리 외의 다른 술은 전혀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니 칼잡이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물쇠가 얼마나 분개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이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던 소리가 잦아들며 침묵이 열병처럼 번져갔다. 물쇠의 얼굴도 열병에 걸린양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허나 그것은 열병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한소리 지르니(大喝一聲) 의자가 산산조각나며 여섯자 큰 몸(巨軀)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다섯 간(9미터) 길이를 단숨에 건너뛰어 칼잡이 앞에 사뿐히 내려앉으니 그 내공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칼잡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니 그 의연함이 얼마나 깊은지 헤아리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쇠는 쌍심지를 곤두세우며 등에서 네 척 길이 빛나는 큰 칼(閃光太刀)을 뽑아들었다. 두터운 칼날이 바르르 떨리더니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높은 소리(高周波振動音)를 내뱉으며 새하얗게(白熱) 달아올랐다. 그러나 칼잡이의 목줄기 한치 앞에 멈춰선 뜨거운 칼끝 언저리엔 차가운 기(寒氣)가 감돌았으니, 그로써 그 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감히 네놈이 내가 주는 술을 마다하다니! 새파란 애송이가 강호의 예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젊은 종업원은 넋이 빠지고 얼이 나가(魂飛魄散)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철퍽 엎드렸다. 겁에 질린 사람은 탁자 밑에 몸을 숨겼으나 아예 앉은 채로 얼어붙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칼잡이는 도망치지도 않고 숨지도 않았다. 여전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릴 뿐이었다.
술집 곳곳에서 침넘어가는 소리가 시계 초침 돌듯 했다. 모두들 하나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칼잡이가 칼을 뽑으리라. 그동안 숨겨 왔던 자신의 칼솜씨(劍術)를 유감없이 보이리라. 둘 중 하나는 붉은 피를 흩뿌리며 스러지리라.
그러나 칼잡이의 오른손은 칼자루가 아닌 술잔을 잡았다. 술잔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려 했지만 목줄기를 위협하는 칼이 방해가 되었다. 그의 시선이 칼끝에서 칼날을 따라 올라가더니 마침내 물쇠에게 이르렀다.
"영감님(老兄). 이 칼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만 칼을 치워주시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판국에 술이라니!
물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강호에 출도한지 어언 사십여 년, 하늘 아래(天下) 곳곳을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오만가지 일을 보고 듣고 겪었건만 자기 목숨보다 싸구려 막걸리를 무겁게 여기는 사람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겪은 적도 없었다.
"대체 뭣 때문에 그 싸구려 술을 마시려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칼잡이의 대답은 단순명쾌했다.
"저는 이 술만 마십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칼잡이와 물쇠의 눈길이 정면으로 맞부닥쳤다. 젊은이와 늙은이, 침착함과 분노, 냉정함과 혼란스러움이 한치 양보없이 격렬하게 부딪혔다(激突).
다음 순간, 물쇠는 칼을 내리고 큰 웃음을 터뜨리더니(爆笑) 솥뚜껑만한 손으로 칼잡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젊은이라면 모름지기 깡다구(根性)가 있어야지. 자네는 분명 나중에 크게 될 걸세(大成)! 그 이름이 하늘 아래(天下) 우레와 같이 울릴 거야! 내가 보증하지. 분명히 크게 될거라고!"
"죄송하지만 전 세상에 내밀 이름이 없습니다(無名)."
칼잡이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는(眞心) 말이었지만, 물쇠에겐 젊은이의 지나친 겸양으로만 여겨졌다. 그는 가볍게 칼을 돌려 칼집에 꽂아넣고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지나친 겸손은 좋지 않다네. 스스로의 능력에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나!"
자신의 이름없음(無名)을 강조해 봐야 부질없다 여겼는지 칼잡이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있는 이야기(德談)를 들은 댓가로 물쇠에게 잔을 권하는 예의는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방금 전의 살기(殺氣)일랑 모두 잊어버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칼 대신 잔을 부딪히고 피 대신 막걸리를 들이키며 협객의 정(情)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잡이의 칼질을 보지 못해 안타깝긴 하지만 소름끼치는 피보라를 피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물쇠의 덕 있음이 소문대로란 사실과 칼잡이의 꺾일줄 모르는 의연함을 확인한 것만도 어지간히 큰 수확이었다.
그날 이후, 칼잡이의 술 즐기는 성격(愛酒)과 배짱 두둑함(大膽)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칼잡이가 열척짜리 칼을 젓가락으로 멈춰 세웠다느니, 술 한동이를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셨다느니 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끝도 없이 부풀려졌다.
무성한 소문 속에서도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과연 물쇠는 칼잡이의 배짱 하나에 놀라 칼을 접었을까? 정말 그랬을까?
사람들은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칼잡이의 뱃심은 두둑하기 짝이 없었고 물쇠의 배포도 그에 못잖았다는 설명에 만족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엇갈리는 아주 짧은 찰나, 물쇠는 칼잡이의 그윽한 눈빛 아래에 숨어있는 무시무시한 살기(殺氣)를 알아차렸다. 칼을 쥔 손가락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멍해지고 온몸이 떨릴 정도로 두려운 살기였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늙은 협객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잘해야 망신이요 못하면 죽을 싸움을 억지로 하느니, 자신의 덕 있음을 과시하며 발을 빼는게 현명했다.
내가 이렇게 단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물쇠가 칼을 접으면서 호탕하게 웃을 때 이마에 콩알만한 식은땀이 맺힌 걸 똑똑히 보았다. 칼을 칼집에 꽂아넣을 때 옷소매로 땀방울을 훔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칼을 쥔 사람이 - 그것도 이름 높은 협객이 - 칼도 뽑지 않은 이름 없는 칼잡이의 눈빛에 압도되어 식은땀을 흘렸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내 주장의 진실됨을 입증하고도 남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칼잡이가 칼을 뽑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칼잡이가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 역시 하지 않았다. 칼잡이가 칼로 사람을 베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예 할 수조차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굴복시키는 이가 칼을 뽑을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짧은 생각이었다.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칼잡이의 어두운 세계에 한 발 들여놓았다. 음침하고 소름돋는 칼잡이의 과거를 접했다. 나라(神國)를 뒤흔들고 하늘 아래 온누리의 사람들(天下人民)을 놀래킨 무섭고도 두려운 음모에 말려들었다. 그리고 칼잡이의 칼을 보는 것은 물론이요, 그의 칼질을 보는 것은 물론이요, 그 칼에 죽는 이도 보았다!
그것은 글쟁이(文人)에겐 너무나 엄청난 행운이며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막상 모든 일이 끝나고 나니, 남은 것은 칼잡이에 대한 연민과 비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決心).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울릴 정도로(驚天動地) 두렵고 거대한 사건의 뒷편에 칼잡이가 있었음을 널리 알리기로 했다.
이는 이름을 떨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영웅이 되고자 하는 야망도 없었던 칼잡이의 뜻을 모독하기 위함이 아니다. 밝은 하늘 아래 나서느니 어두운 그림자 아래 숨어 있기를 선택한 칼잡이의 결심을 더럽히기 위함도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다. 그 뿐이다. 오직 그 뿐이다.
그럼 이제 머릿말을 접고, 괴기스럽고도 신비로운 지난날의 모험담을 더함도 없이 덜함도 없이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그대로 풀어보도록 하겠다.

 

 - 계속 -

2009/02/18 22:52 2009/02/18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