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는 형과 함께 비트코인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처음에는 비트코인 같은 전자화폐에 관해서 떠들다가, 어느덧 기축통화에 관한 주제로 빠지고, 결국에는 금본위제에 관한 것까지 논하다가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부닥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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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렇군. 화폐란 과연 뭘까.
여기서 떠오르는 건 미크로네시아 군도에 있는 야프 섬의 이야기다.
옛날 코메디 프로나 만화에선 남태평양 원주민 복장을 한 사람들이 거대한 돌로 된 돈을 낑낑대며 들고 나와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장면이 왕왕 있었다. 요즘 시대에 이런 꽁트를 했다가는 인종차별이라고 욕을 먹겠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문제없이 용납되었다. 그게 좋은 시대였는지 나쁜 시대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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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간에 그 "거대한 돌로 된 돈"이 실제로 돈으로 유통되던 곳이 야프 섬이다. 작은 건 직경 30센티 정도, 큰 것은 3미터 이상으로 그 무게만 5톤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 돌덩이, 아니, 돈덩이는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원형으로 가공한 다음, 가운데에는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에 막대기를 넣어서 앞뒤로 굴리면서 운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이 돈덩이는 보통 석회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문제는 야프 섬에는 석회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려 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팔라우 섬까지 가서 원형으로 잘라서 구멍을 뚫고 카누나 뗏목에 실어서 야프 섬까지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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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석기시대를 벗어난 기술 문명밖에 없는 사람들이 언제 폭풍우가 몰아칠지도 모를 왕복 1,000킬로의 바닷길을 항해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다. 거기에 직경 3미터에 무게 5톤짜리 돌덩이(돈덩이)까지 운반하는 과업까지 겹친다면 그야말로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할 정도다.
그렇게 가져온 돌덩이(돈덩이)는 그 크기는 물론, 항행의 어려움에 따라 가치가 정해졌다. 요컨대 가져올 때 풍랑이 불었다거나, 상어떼가 덤벼드는 바람에 악전고투를 했다거나, 전설의 흰고래와 부딪혀서 같은 배에 탔던 동료들은 모두 죽고 자신은 한 다리를 잃었다거나…… 항해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돌덩이(돈덩이)의 가치는 오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다. 각각의 돌덩이(돈덩이)에 그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따라붙게 된 것은 당연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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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돌덩이(돈덩이)로 어떻게 거래를 한 것일까? 직경 30센티짜리라면 들고 다닐 수도 있을 테고, 1미터만 되도 데굴데굴 굴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3미터짜리라면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날라야 하지 않을까?
야프 섬의 주민들은 그렇게 멍청하진 않았다. 그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을 썼다. 예를 들어 카네소라는 사람이 차모로의 땅을 사면서 돈을 지불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기 집 뒷마당에 놓여진 3미터짜리 돌을 가리키며 "이제 이건 차모로의 돈이다!"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됐다.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거나 낙인을 찍는 번거로운 짓거리도 일절 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돌덩이(돈덩이)는 차모로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게 여전히 카네소의 집 뒷마당에 있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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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독일이 야프 섬을 지배하고 있을 때 야프 섬에는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다. 능률과 효율을 중시하는 대독일 제국이 이런 걸 그냥 보아넘길리 없다. 당연히 도로 공사에 착수했지만, 자동차하곤 인연이 먼 야프 원주민들은 도로 공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도로 공사를 하지 않는 지역 원주민들에게 벌금을 매기기로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도대체 어떻게 벌금을 매겨야 하는 거지? 저 돌덩이(돈덩이)를 압수해서 정부청사로 옮겨야 하나? 저걸 다 압수하려면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 거지? 자동차도 있어야 하잖아? 잠깐만, 그놈의 자동차를 다니게 하려고 도로를 뚫으려고 한 거잖아!
독일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벌금으로 압수하기로 한 돌덩이(돈덩이)에 독일 정부 소유라는 것을 뜻하는 X자 문양을 페인트로 그린 것이다.
전 섬의 돌덩이(돈덩이)에 X자 낙인이 찍히면서 섬사람들은 갑자기 빈곤층으로 추락해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야프 섬 사람들은 자신의 돈을 되찾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도로 공사에 매달렸고 결국 독일 정부가 원하던 도로가 뚫리게 됐다. 그러자 독일인 공무원들은 돌덩이(돈덩이)의 X자 낙인을 지웠고, 돈을 되찾은 섬사람들은 다시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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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돌덩이에 누가 뼁끼칠 좀 했다고 소유주가 바뀌다니! 장난치냐!
하지만 야프 섬의 돌덩이(돈덩이) 화폐 시스템과 현대의 화폐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어제 내 통장에 들어온 월급은 내가 만져볼 기회도 없이 빌어먹을 카드 회사로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내 통장에 남는 것은 회사에서 돈을 지불한 기록과, 카드 사로 빠져나간 기록 뿐이다. 실물 화폐는 은행 금고에 들어있는 채 전혀 움직이지 않지만 디지털로 처리된 숫자 몇 개, 글자 몇 개 차이로 소유주가 바뀌는 것이다.
화폐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동작하기 위해선 화폐 가치에 대한 믿음과 상호 신용이 필수적이다. 거꾸로 말해 그 믿음이나 신용이 붕괴하는 순간, 화폐 시스템은 붕괴하게 된다.  
야프 섬의 돌덩이(돈덩이)의 운명이 바로 그러했다. 외부인들이 대량의 석회석 돌덩이를 유통시키면서 섬사람들 사이에서 돌덩이(돈덩이)의 가치는 계속해서 떨어지다가 마침내는 제로로 수렴하고 말았다. 구두로 돌덩이를 주고받던 구시대적인 신용 거래 대신 현대적인 은행 거래가 정착했다. 이제 야프 섬에 남아있는 거대 돌덩이는 더 이상 돈으로써 유통되진 않는다. 관광 상품 중 하나로 전락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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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은 사실 이 돌덩이와 비슷하다. 1) 얻기는 어렵지만 2)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보편타당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3)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시스템에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극히 폐쇄적인 시스템 하에서 유통되고 있다. 그나마 돌덩이는 훔쳐간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물건이지만, 비트코인은 해킹으로 간단히 탈취당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게 과연 안정적인 화폐 시스템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글쎄, 그게 가능하다면 야프 섬의 돌덩이도 다시 화폐로 유통될 수 있겠지!
2017/12/07 23:43 2017/12/07 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