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은 진실만을 말하지"
- 크리시, [Man on fire] 중에서 -


타가미 요시히사의 [Nervous Breakdown]이라는 추리 만화는, 각 에피소드마다 걸작 추리소설의 제목을 차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Man on Fire란 제목의 에피소드다(주 1).
A.J. 퀸넬의 [불타는 사나이 Man on Fire]는 '크리시'라는 전직 외인부대 출신의 미국인이 등장하는 액션 소설이다. 미국에선 꽤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퀸넬은 '크리시'가 시리즈를 계속해서 집필했다. 말하자면 [불타는 사나이]는 [크리시] 연작의 첫번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시공사에서 총 5편의 시리즈를 번역 출간했지만,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다 구해보진 못했다. 기껏해야 [불타는 사나이]를 중고서점에서 어렵사리 구입해 읽어본 것이 전부다.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혐오하여 마음을 닫은 채 술에 쩔어 지내던 한 명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어린 여자애를 경호하면서, 닫혀 있던 마음을 열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는 경호에 실패하고, 여자애는 무참하게 강간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사나이가 선택한 길은 단 하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 연소시키는 것이었다!

단순무식한 마쵸 폭력 액션, 그것이 [불타는 사나이:크리시]다. 어찌 보면 무협지와도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무협작가 용대운은 이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얻어 [유성검]이란 무협 소설을 쓰기도 했다(불행히도 이 무협소설의 완성도나 재미는 중간 이하 수준이다).

그렇다면 영화 역시, 복수심에 사로잡힌 싸나이의 완전 연소극이 되어야 옳으리라. [라스트 보이스카웃] 등에서 감각적이고 현란한 액션을 보여준 토니 스코트 감독, 연기력으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덴젤 워싱턴이 손을 잡았으니, 어찌 기대하지 않을소냐.

헌데 웬걸, 영화 [Man on Fire]는 기대를 배신하고 불완전 연소로 끝나 버렸다!

토니 스코트 감독은 감각적이고 현란한 액션에 능숙하지만, 호흡 조절이 서툰데다 시나리오를 보는 눈은 아예 형편없는 수준이다. 덴젤 워싱턴은 지적 용모를 갖춘데다 연기력도 훌륭한 좋은 배우지만, 왠지 액션 영화엔 어울리지 않는다.

전쟁터를 누비며 살육을 일삼았던 과거를 후회하며 자살을 기도하기마저 하는, 그러나 어린 여자애의 도움으로 점차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 중반부까지의 '크리시'의 연기는 완벽에 가깝다. 역시 덴젤 워싱턴이란 찬사를 금할 길이 만무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자애가 납치되어 살해당한 중반 이후부터다.
'크리시'는 악당들에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로켓포를 쏘아대며 뜨겁고 파괴적인 복수를 수행하지만, 정작 그 눈빛에선 불타는 사나이로서의 위압감이라곤 쥐뿔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복수]의 강대위처럼 피끓는 분노를 얼음과도 같은 냉혹함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고, [첩혈쌍웅]의 주윤발처럼 슬픈 사랑을 핏빛 무정함으로 물들이지도 못했다... 덴젤 워싱턴은 헐리웃 영화에 흔해빠지게 나오는 보통의 킬러를 연기하는 데서 멈춰섰을 뿐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정신이 없으리만치 빠르게 지나가지만, 이후로는 점차 호흡이 느려진다. 사나이가 여자애와 친해지는 과정도, 여자애가 납치당하는 과정도, 사나이가 불타는 복수를 행하는 과정마저도, 쓸데없이 장황하다. 그러노라니 영화 상영시간은 2시간을 훌쩍 넘긴 147분이나 된다.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영상으로도 끝없는 지루함을 달래기는 부족하다.
'복수'의 의미조차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는 반전 아닌 반전 앞에선 짜증이 북받쳤고, 상업주의와 적당히 타협한 결말에는 분노가 솟구쳤으니, 나 자신이 불타는 사나이가 된 듯 하였다!

현란한 액션과 적당한 재미를 추구한다면 2시간 동안 그냥저냥 재미있게 봐줄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원작 팬으로써 이번 영화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면, 100% 실망할 것이다.

평점 : 10점 만점에 3점. 오랫만에 본 크리스토퍼 왈켄을 위하여 1점 더 얹어준다.

(주 1 : 추리소설이 아닌 액션소설의 제목을 차용한 이유는, 이 에피소드의 등장인물 중 한명인 '쿠츠키 사부로'가 외인부대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궁금해서 뒤져봤더니, 쿠츠키 사부로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페다인 - 전사]의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Nervous Breakdown]엔 [카루이자와 신드롬]이나 [메탈 헌터 D]의 캐릭터도 가끔 얼굴을 들이밀곤 한다)
2004/10/23 12:36 2004/10/23 1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