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아이폰이 모토롤라의 레이저폰처럼 몰락할 거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 의외로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아이폰과 레이저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다. 레이저폰은 디자인 하나만을 무기로 삼았지만, 아이폰은 디자인, OS, UI, 어플리케이션, 콘텐츠, 등등을 총체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다.
레이저폰은 매우 전통적인 상품 전략 - 끊임없이 신제품을 출시해 구제품을 밀어내는 - 계획적 진부화 전략의 산물이었다. 겉모양만 살짝 바꾼 후속 제품 또는 파생 제품의 불발은 당연히 몰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참고 링크 : 계획적 진부화에 관한 엔싸이버 백과사전 설명)

그러나 아이폰의 경우는 다르다. 1년 전의 하드웨어도 최신 OS로 업데이트할 수 있다. 앱스토어에 올라온 어플리케이션도 거의 대부분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고, 최신 컨텐츠도 즐길 수 있다.  한 번 구입한 제품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그로써 애플 제품에 대한 신뢰감과 충성심을 키우는 것이 매킨토시 이래 쭉 지속되어 온 애플의 전략이다.

여기 대해서는 이미 2009년 6월, 일본 PC Watch의 컬럼니스트 혼다 마사이치 씨가 [WWDC 키노트로 생각하게 된 계획적 진부화 시대의 종말]이란 제목의 컬럼에서 지적한 바 있다(당시 WWDC에선 Iphone OS 3.0과 3GS가 발표되었다). 이 역시 보자마자 번역해서 사내에서 공유해 봤는데,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블로그에서도 공개하고자 한다.
상품 기획, 마케팅에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 번역 퀄리티에 대해선 부디 딴지 걸지 마시길.


<<WWDC 키노트로 생각하게 된 계획적 진부화 시대의 종말>>

이번 주 들어 가장 큰 화젯거리는 애플이 WWDC 2009의 키노트에서 발표한 일련의 기술 및 제품이었다. 각각의 제품에 관해서는 금후 여러 레포트가 게재될 것이다. 필자 역시 그에 관해 기사를 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련의 발표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품 자체가 아닌, 애플의 장기적인 상품 전략의 대단함이었다. 제품 각각의 우열을 여기서 논할 생각은 없다(당장 시험해 볼 수 있는 제품도 없으니까). 하지만 대량 소비시대의 상식이었던 – 이전에 판매되던 모델을 깎아내리는 “계획적 진부화 전략”과는 정반대로 가는 애플의 수법은, 가전기기 업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계획적 진부화 시대

여기에 휴대전화가 있다.

휴대전화는 반년에 한 번 가량 새로운 모델이 등장한다. 메이커가 새로 개발한 신기능을 탑재하고 새로운 디자인과 신형 기구를 채택하고, 이통사가 업그레이드한 신 서비스에 대응하는 신제품이 나오면서, 과거의 제품은 순식간에 구닥다리로 전락해 버린다. 즉, 진부화되는 것이다.
짧은 사이클로 모델 변경을 반복하고, 그때마다 서비스와 기능을 업데이트해서 사용자로 하여금 새 걸 사고 싶게 만드는 수법. 필자는 이게 나쁘다고 생각진 않는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진보시키려면 한 발씩 착실하게 앞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이런 방법이 제대로 기능하기만 한다면, 메이커와 이통사, 사용자 등 3자 모두에게 골고루 이득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팽창하기만 할 것 같은 수요도 언젠가는 포화상태에 빠진다. 실제로 아는 신문사의 기자가 귀띔해 주길, 2008년 후반부터 휴대폰의 신기능에 대한 주목도가 눈에 띄게 급감했다고 한다. 어쩌면 메이커와 통신 회사에 의한 계획적 진부화 전략이 슬슬 벽에 부딪히고 있는 건 아닐까.

며칠 전에는 세계최대 자동차 메이커였던 GM이 미 연방 파산법 11조에 의해 파산 절차에 들어갔다. 시대에 맞지 않는 기업전략과 세계적 불황이 겹친 것이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GM은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정기적으로 내 놓으면서, 기존에 판매하던 차를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 즉, 계획적 진부화 전략을 최초로 시작했던 기업이다. 이는 대량소비시대에 가장 적합한 제품 전략이라고 일컬어지면서, 일본 메이커도 열심히 따라했던 수법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젠 슬슬 끝날 때가 된 건 아닐까?

내 손에 있는 아이폰 3G는 새로 발표된 아이폰 3GS보다 뒤떨어진다. 어쨌건 발표에 따르면 거의 2배 정도 속도 차가 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미 1년 전에 발표된 아이폰 3G는 낡아빠진 구닥다리 폰일까? 그렇진 않다.

아직 아이폰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진 모르겠지만 - 나 개인적으로는 “S”자가 붙지 않은 아이폰 3G를 구식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이폰은 어디까지나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키는 플랫폼에 불과하며, 실제 모든 기능은 소프트웨어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전세계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앱스토어를 무대로 갖가지 아이디어를 선보이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낡은(!) 아이폰 3G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

새로운 아이폰 3GS은 카메라 유닛이 변경되고, 내장된 LSI도 최신의 것으로 교체되고, 새로운 자기 센서도 추가되었다. 그러나 외관은 변경되지 않았다. 유저 인터페이스의 요소도 변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외관이나 인터페이스도 바뀔 게 분명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척하기 위한 도구로써 플랫폼에 통합되는 것이지, 일시적인 기능을 실현시키기 위한 홀림수는 아닐 것이다.

 - 계획적 수명 연장 시대

아이폰 3G가 일본에 발매됐을 때, 필자는 “1년에 한 번 정도, 애플은 새로운 하드웨어 발표와 동시에 아이폰 OS를 업데이트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버전의 아이폰 OS가 적어도 2세대분의 하드웨어를 지원하게 될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이것은 아이폰이 여러 나라에서 이동통신사와의 2년 계약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로 예측한 것이었다. 구입후 2년이 지나 이통사와의 계약이 풀리면, 그 시점에서 새로 나온 하드웨어를 구입해서 신기능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이 정도라면 사용자도 별 불만을 갖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아이폰 소프트웨어 3.0은 2세대 전의 초대 아이폰을 포함해 총 3세대의 하드웨어에서 작동하며, 사용자에겐 무상으로 업데이트가 제공된다. 다음 버전 OS에서도 초대 아이폰이 지원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3세대 분의 동작은 보증해 줄 것이다.

즉, 하드웨어를 기능면에서 진부화시키지 않는 대신, 순수하게 하드웨어 플랫폼의 성능 차이만으로 사용자 스스로 새 제품을 구입하는 타이밍을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부 하드웨어의 제한에 의한 기능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기능은 모두 동일한 최신 기능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이처럼 “진화하는 휴대폰”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비자도 바보는 아니다. 휴대폰을 새로 살 때 “(억지로)사게 되는” 측면이 있다는 걸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신제품을 구입해 왔다. 그런 와중에 “하드웨어의 계획된 수명 연장”를 축으로 하는 아이폰의 제품전략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이건 아이폰뿐만이 아니라 맥북, 맥북 프로, 맥북 에어, 맥 프로, 아이맥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지는 전략이다. 잡스가 돌아온 뒤 10여년간, 그가 제품 계획을 컨트롤하게 된 이후로 애플의 제품 디자인이나 유저 인터페이스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대신, OS와 소프트웨어를 움직이는 플랫폼으로써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두고 제품을 출시해 왔다. 특히 요즘 와선 그런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이를 테면 유니바디를 채용하지 않은 전세대의 맥북 프로를 돌이켜 봤을 때 낡은 하드웨어란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어쨌건 그 디자인은 인텔 프로세서를 채용하기 이전의 Powerbook G4시대부터 계승된 것이다. 낡고 진부한 하드웨어라고 생각해도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지금 다시 봐도 신선한 데가 있는 디자인이다.

물건으로써의 소유감과 기능성, 질리지 않는 디자인 등에 충분한 비용을 들이는 대신, 하드웨어 플랫폼으로써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적 수명 연장 전략은 맥에 있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 업계의 마이너리티 맥 OS 머신” 이라는 숙명이 낳은 제품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게 서서히 현재 시장환경에 들어맞는 상황이 온 것이다.

 - 이제부터 뭘 할 수 있을까?

전부라고 말 할 순 없지만, 대다수의 일본제 PC는 계획적인 진부화 전략에 매몰된 제품들이다. 필자는 여러 해 전부터 대형 PC 업체의 간부를 만나 얘기할 때마다 “단기적인 마이너 체인지에서 별 필요도 없는 디자인 변경이나 플랫폼 변경을 반복하는 건 낭비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때마다 “스펙을 높이는 동시에 디자인까지 함께 바꿔 주지 않으면, 소비자는 신제품으로 봐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젠 슬슬 생각을 바꿔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대불황의 시대다. 물건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전략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넷북이 신규 유저를 개척하고 있다곤 하지만 넷북으로 만족하는 사람에게 풀 기능을 탑재한 PC를 팔아 넘긴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계획적 진부화 따위 전략에 매달리고 있다간, 앞으로의 세상에서 PC의 존재감은 점점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계획적 수명 연장은 OS나 서비스의 기반을 갖지 않은 순수한 PC메이커가 채용하기 어려운 수법이란 의견도 많지만, 제대로 차별화된 제품을 제공해서 수명 연장을 달성한 메이커도 있다. 이를테면 파나소닉의 Let’snote가 그렇다.

Let’snoste는 컨셉이 제대로 잡힌 하드웨어 플랫폼을 여러 개 만들어, 그걸 마이너 체인지 하는 방식을 쓴다. 마이너 체인지를 하더라도 금방 구닥다리가 되지 않는 만듦새란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고 있다. 레노보의 씽크패드 시리즈 역시 IBM 시대부터 같은 수법을 써 왔다.

NEC나 후지쯔 등 폭넓은 라인업을 가진 메이커가 모든 분야에 걸쳐 이런 수법을 쓰긴 어렵다. 하지만 한정된 분야에서 이런 식으로 프리미엄 급 제품 라인을 건설하는 건 충분히 도전할 만 하다.

“저건 애플이니까 가능한 거지. 우린 입장이 달라” 라고 말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지금부터 뭘 할 수 있을까? 뭘 바꿔야 하는가? 그런 걸 생각하지 않다가는 GM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시장환경의 변화를 보면서 그저 주저앉아 흘러가길 기다리고만 있어 봐야, 과거에 저축해둔 돈을 까먹기만 할 뿐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 필요한 건 과감한 전략 변경이 아니다. 아주 조금씩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제품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절하는 걸 꾸준히 반복하는 것이다.

 - 끝 -
2010/02/05 15:49 2010/02/05 1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