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천룡검(天龍劍) (1)
옅은 갈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넓은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어깨에는 길쭉한 가죽 가방을 걸쳐 멨다. 시원한 바람,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자유롭게 흩날린다.
검룡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 풍경을 살폈다. 길 옆에는 잘 생긴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섰다. 멀리 떨어진 야트막한 산등성이에는 오래된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고 그 아래 벌판에는 논밭이 펼쳐졌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상쾌한 공기, 귓가를 스치는 것은 새들의 노랫소리, 멀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름한 집.
허름하다기보다는 퇴락했다는 표현이 더욱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붉은 벽돌을 쌓아 어른 어깨 높이로 쌓아 올린 담벼락은 거센 비라도 내리면 쓸려 내려갈 듯이 위태로웠다. 군데군데 녹슨 철제 대문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채 반쯤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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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은 넓었다. 한쪽에는 크고 굵직한 스테인리스 쇠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지름이 손바닥 한 뼘에 높이는 사람 키보다도 컸다.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창고와도 같았다. 콘크리트를 울퉁불퉁하게 바른 벽은 온통 금이 갔고, 평평한 슬레이트 지붕은 끝자락이 보기 흉하게 부서졌다. 그 안에서 들리는 것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아닌, 망치로 쇠를 두들기는 소리. 그 안에 있는 것은 장롱이나 침대가 아닌, 뜨거운 쇳물을 녹이는 화덕. 그 안을 밝히는 것은, 불투명한 유리창이 끼워진 좁은 창문에서 쏟아지는 희미한 햇빛과 뜨거운 불길, 그리고 미친 듯이 번들거리는 한 쌍의 누리끼리한 눈.
"나요, 영감."
검룡의 말에, 모루에 놓인 쇠를 두들기고 있던 대장장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는 예순 가량, 키는 작고 허리는 새우처럼 굽었다. 때가 꼬질꼬질한 하얀색 러닝 셔츠와, 대장장이 일로 다져진 구릿빛의 땀투성이 근육, 살짝 벌어지고 뒤틀리며 기묘한 웃음을 터뜨리는 두꺼운 입술.
"이거야 원, 이게 누구야? 우군장 나리 아니신가? 이 먼 곳까지 웬일로 행차를 하셨나?"
"그야 당연히 칼을 가지러 온 거죠." 검룡은 노인의 손을 붙잡고 흔들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도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영감에게 내 칼을 맡겨 뒀다더군요."
"안 그래도 슬슬 자네가 올 때가 됐다 싶었어. 벌써 그 일을 맡은 지도 1년이 다 됐거든."
"1년 전이라고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검룡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작년 이맘때쯤 일이야. 도주님이 몸소 예까지 찾아와서 자네 칼을 부탁하시더구먼. 그런데 자네가 칼을 찾아가는 건 1년 뒤의 일이 될 테니까,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좋은 칼을 만들라고 이르시더라고."
"과연 도주님의 도력(道力)은 우리네 범인(凡人)의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검룡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가방 안에서 부러진 환도를 꺼내 들었다. "실은 오늘 새벽에 칼춤을 추다가 이렇게 칼을 부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저런, 자네답지 않군. 칼춤 따위나 추다가 칼을 부러뜨리다니 말이야." 노인은 낄낄대며 말했다.
그러더니 환도를 받아서 반들반들한 모루 옆에 내려놓고, 손에 낀 목장갑을 벗어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기울인 채 팔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룡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한때 그 노인에겐 강희섭이란 번듯한 이름이 있었다. 한때 그 노인은 S 대학의 금속공학과에서 조교 노릇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쇠를 두드리는 일에 빠진 뒤로, 칼 만드는 일에 미친 뒤로, 그는 대장장이 강노인이 되었다.
강노인은 건너편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창문이라곤 하나도 달려 있지 않기에 벌건 대낮부터 어둠에 잠긴, 한쪽 구석에 달려 있는 제습기와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제외하면 완전한 침묵에 잠긴, 넓은 방이다. 노인은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렸다. 천장에 붙은 형광등에 차례로 불이 들어오며 살풍경한 모습을 밝혔다.
사방의 벽은 온통 칼이었다. 큰 칼, 작은 칼, 도신(刀身)이 넓은 칼, 검신(劍身)이 좁은 칼, 올곧게 뻗은 직도(直刀), 크게 휘어진 만도, 길다란 월도, 짧은 예도, 서슬 퍼런 몸뚱이를 드러낸 채 요염하게 누워 있는 칼이 있었고, 화려하게 장식된 칼집 안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는 칼이 있었다.
"자,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보시게나."
검룡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날 시험하는 거요?"
"당연하지." 강노인은 낄낄대며 말했다. "1년 동안 생고생을 하면서 만든 칼이야. 그게 어떤 칼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놈에게 선뜻 줄 것 같아?"
"내가 그 칼을 찾아가지 못하면 어쩔 거요?"
"죽을 때 무덤에 가져 갈 거다. 왜, 떫으냐?" 노인은 다시 낄낄거렸다.
검룡은 천천히 벽을 따라 걸었다. 강노인은 그 옆을 졸졸 따라가며 읊어댔다.
"한때 사람들이 왜놈들이 만든 칼만 찾던 시절이 있었지. 일본도의 예리함이 어쩌고저쩌고, 접쇠로 만들었기 때문에 칼날이 잘 휘어지지 않는다느니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다 쓸데없는 소리야! 쇠를 접었다 폈다 해서 만들면 칼날에 멋들어진 물결무늬가 들어가서 보기 좋긴 하겠지만, 그뿐이란 말이지. 그 정도 물결무늬는 식칼 만드는 공장에서 흉내 낼 수 있고, 그 정도의 예리함은 식칼에서도 충분히 맛볼 수 있단 말이지."
"그만큼 기술이 발전했으니까요."
"그렇지. 열처리 기술도, 합금 기술도 모두 발전했어. 모두 다 옛날하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노인의 눈에 야릇한 광채가 감돌았다. "하지만 칼의 정체성엔 변함이 없어. 살을 베고, 목숨을 빼앗고, 피 맛을 보는 것이 칼이란 말이야. 피에 대한 집착과 갈망, 그게 빠진 칼은 칼이 아니라 끝이 조금 뾰족하고 날카로운 쇳덩이일 뿐이지."
그는 칼을 사랑했다. 칼을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다. 자신이 만든 칼이 사람을 죽이며 피를 뿌리는 광경을 상상하며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대장장이가 되었고, 칼을 만드는 일에 기꺼이 반평생을 바쳤다. 피에 대한 집착을 풀무질로 칼끝에 불어 넣고, 피에 대한 갈망을 담금질로 칼날에 새겨 넣기 위해서.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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