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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었다. 천 근 만 근 무거운 눈꺼풀을 떼니 광선이 일직선을 그리며 앞을 밝혔다. 몇 번을 깜박인 끝에야 겨우 눈을 치켜 뜰 수 있었다.
현지위는 자신이 침상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요는 딱딱했고 이불은 더러웠다. 옆에 붙어 있는 좁은 창문에서 새벽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독기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차갑게 식은 모래의 냄새가 섞인 아침 공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기(氣)를 가다듬었다. 한 숨을 들이쉬고 기를 모으고 다음 숨을 내쉬며 혈맥을 따라 기를 운행했다. 대략 밥 한 공기를 먹고 마무리로 더운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어느 정도 독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동이 튼 지 오래였다.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당장 몸을 움직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리면 독기가 들끓어 오를 것이 분명했다.
'하루라도 빨리 사문에 돌아가 독을 다스려야겠군.'
현지위는 허리를 쭉 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창문에서 바깥이 내려다 보이는 걸 보아하니 2층 객실인 듯 했다. 방은 좁고 지저분했다. 가운데 놓인 탁자에는 자신의 장검이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다.
그는 칼을 집어 허리에 차고 문을 열었다. 발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며 울어대는 좁은 낭하의 난간 아래로 식당이 보였다. 상쾌한 아침햇살에 칙칙한 마룻바닥 깊이 배인 검붉은 핏자국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리고 창가에 접한 넓고 깨끗한 자리에는 어제 현지위를 도와준 가죽옷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사내의 아침 식사는 조밥에 야채 볶음 한 접시, 미지근한 엽차 한 잔이었다. 밥과 야채를 한 입에 넣고 게걸스레 먹어대며,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선한 공기를 반찬 삼아 들이마셨다.
현지위는 계단을 내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내 앞에서 손을 마주잡고 길게 읍하며 인사를 올렸다.
"대협, 지난 밤에 상황이 급박하여 제대로 인사조차 올리지 못한 것을 사과 드립니다. 대협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죽어 백골이 된다 한들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내는 밥을 입에 넣은 채 우물대며 말했다.
"별 것도 아니었소. 나는 그저 당신 입에 구토제를 흘려 부었을 뿐이오. 하룻밤 만에 그 정도로 회복된 것은 당신이 젊고 건강하기 때문이지, 내 덕분이 아니오. 더군다나 강호란 은혜를 주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곳이오. 그러니 당신이 잊는다 해도 개의친 않겠소. 사실 죽어 백골이 된 뒤에 그까짓 은혜를 기억해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현지위는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다시 허리를 숙였다.
"대협의 큰 은혜를 입은 이놈은 현무문의 현지위라고 합니다. 대협의 높으신 이름은 어찌 되십니까?"
"나? 나는 장손혁이라 하오."
장손혁,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현지위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눈을 크게 뜨고 속으로 외쳤다.
'철혈무쌍(鐵血無雙) 장손혁(長孫赫)!'
그것은 무정하다기보다는 비정하다고 해야 마땅할 이름이었다. 잔인하진 않지만 냉혹한 이름이었다. 눈 먼 사랑에는 코웃음치고 우정의 가치는 통렬하게 비웃고 오직 주판알 튕기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타산적인 이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름 앞에 철혈무쌍이란 별호를 붙였다. 인간의 혈관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지만 철혈무쌍의 혈관에는 오직 차가운 수은(水銀)이 흐른다는 평판이 뒤따랐다.
강호의 세력 다툼에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어느 패거리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어느 문파도 도와주지 않았다.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돈이었다.
그는 살인, 강도, 강간을 저지른 중죄인, 명문 정파의 지엄한 규율을 어기고 도망친 사문난적(斯文亂賊), 관아에서 혹은 뒷거리에서 현상금이 걸린 자의 목을 가져오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냥꾼이었다. 사냥감은 살려서 데려온 적이 없었고 생포하는 일거리는 아예 맡지를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위험한 만큼 벌이가 짭짤하거니와, 발버둥치며 반항하는 인간을 끌고 오는 것보다는 그 모가지만 잘라서 들고 오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에 관한 소문을 되새기던 현지위는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혈무쌍은 아무런 이해타산도 얽히지 않은 사람을 살려줄 정도로 자비롭거나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손대협께서 저를 구해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장손혁은 엽차로 입가심을 하고 길게 트림을 했다. 그러더니 입맛을 다시며 허리를 숙여 뭔가를 집어 올렸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소이다. 실은 이것 때문이오."
어제 그가 짊어지고 왔던 봇짐이었다. 보자기를 풀어헤치니 나무 상자가 드러났다. 그는 뚜껑을 가리키며 현지위를 쳐다봤다.
"열어 보시오."
현지위는 잠시 주저하다가 뚜껑을 열어젖혔다.
코의 점막을 자극하는 곰팡내, 비린내, 썩은내가 밀어닥쳤다. 그리고 원한과 증오와 공포로 무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허윤!"
현지위는 상자가 부서져라 꽉 붙들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허윤의 머리였다. 소금에 절인 살갗은 밀랍처럼 반들거렸고 눈알이 썩어 눈꺼풀이 꺼졌고 입술은 괴상하게 일그러져 허연 이빨을 드러냈고 목이 잘린 그루터기엔 검붉은 핏방울이 말라붙었다. 하지만 형상의 참혹함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아침의 시장기조차 날려 버리는 역겨운 냄새였다.
장손혁은 뚜껑을 닫고 상자를 다시 보자기로 쌌다.
"이 머리의 값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당신이 살아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요."
현지위는 그를 마주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며 입을 열었다.
"결국 그렇게 죽었구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그는 너무나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한때 동문수학했던 사제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그가 자신이 존경하던 대사형을 해친 살수이자 죽음으로 처벌받아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은 기억에서 흐릿해지고 그에 대한 증오심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과 순결한 연민뿐이었다.
"저, 저, 뭔가 드시겠습니까?"
피로한 얼굴의 객잔 주인이 뻣뻣한 걸음으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현지위는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주인은 자신이 지은 죄를 아는지라 재빨리 등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저 사람에게 화낼 필요는 없소. 저 자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술에 독을 탔을 뿐이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 탄 것이 아니란 말이오."
이해하기 힘들지만 아주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소. 사문을 배신한 순간부터 이 자는 이미 당신의 동문이 아니었소. 지금은 은자 서른 냥짜리 고깃덩이에 불과하고."
은자 서른 냥, 현지위의 머리에서 어젯밤의 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어제 백백신교의 무리와 은자를 흥정하지 않았습니까?"
장손혁은 부인하는 대신 엽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앞뒤로 끄덕였다.
"맞소. 당신 머리에 은자 서른 냥을 불렀소."
"왜 그랬죠?"
그 질문에 장손혁은 보자기에 싼 상자를 손바닥으로 텅텅 소리 내어 두들겼다.
"보시오. 내가 가져온 이 머리는 서른 냥의 값어치가 있는 머리요. 하지만 만일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현무문에서 그 상금을 타내기란 불가능할 거요. 그래서 당신의 목에 똑같이 서른 냥의 값을 매겼는데, 백백신교인지 뭔지 하는 그 멍청한 무리들은 고작 동전 열 닢으로 타협하려 했소. 은자 서른 냥과 동전 열 닢, 바보 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쪽을 선택할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소?"
계산인즉슨 타당하지만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에 현지위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만일 그들이 은자 서른 냥을 낸다고 했으면 어쩔 셈이었소?"
그는 태연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다섯 명을 죽이는 것보다는 한 사람을 죽이는 편이 양심의 가책이 덜한 법이오."
협객의 의리나 자부심은 터럭만치도 섞여 있지 않는 말투였다. 그보다는 순진한 사람들을 등쳐서 재산을 긁어 모은 인색하고 후안무치한 수전노의 뻔뻔함이 짙게 묻어났다. 현지위는, 사부님이 사제의 목에 서른 냥이라는 막대한 상금을 건 덕분에 모가지가 날아가는 신세를 면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이런 자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한심스러워 그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둘 사이에 떠돌던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을 깬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점소이 소년이었다.
"준비가 다 됐어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쪼르르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손혁은 다시 한 번 트림을 하며 일어났다.
"자, 나가 봅시다."
현지위는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물었다.
"무슨 준비가 됐다는 겁니까?"
"장례 준비 말이오. 어제 죽은 영감의 장례는 치러야 할 것 아니오."
그제야 현지위는 백하응이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신에게 손녀딸을 부탁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선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었다.
"랑랑은 어디 있습니까?"
"일찌감치 밖에 나가 있었소. 우리도 빨리 갑시다."
장손혁은 현지위를 데리고 나가 마구간 뒤편으로 돌아갔다. 펑퍼짐하고 넓은 바위 아래, 흙을 얕게 파고 관을 넣어 흙모래와 자갈을 덮은 야트막한 무덤이 보였다. 향불조차 없는 초라한 젯상 앞에는 랑랑이 엎드려 있었다. 맑았던 눈은 슬픔에 어두워지고 귀엽던 얼굴은 초췌해지고 발그레한 뺨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지저분해졌다.
장례 준비를 어떻게 한 것인지 묻자 장손혁은 이렇게 답했다.
"어젯밤부터 주인장을 다그쳐 관을 대강 짜 시체를 넣고 묻었소."
조금 떨어진 곳에는 훨씬 넓고 높은 돌무덤이 있었다. 흙과 돌의 상태를 보아하니 갓 쌓은 무덤이었다. 장손혁은 그 무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모가지가 달아난 멍청이들은 저기 아무렇게나 파묻었소. 은자 서른 냥을 아끼던 놈들에겐 관을 짜줄 필요도 없으니까."
현지위는 인색한 수전노의 황당한 윤리관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철혈이로구나.'
세상의 끝에서 불어오는 굵은 모래가 섞인 쌀쌀한 바람이 턱밑을 핥았다. 허술한 무덤은 쓸쓸했고 칭얼대며 울어대는 어린 상주는 가련했다. 어설프게나마 장례를 마친 뒤에 현지위는 랑랑을 이렇게 위로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곳에서 할아버지를 잃는 참변을 당했으니 네 처지가 참으로 가련하구나. 하지만 아무 걱정 말거라. 이 오래비가 책임지고 너를 네 할머니에게 데려다 주마."
소녀는 훌쩍이면서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손혁은 턱을 가볍게 긁으며 현지위를 쳐다봤다.
"그런데 여기 묻힌 영감이 천리이 백하응이 맞소?"
"우리 할아버지더러 영감이라뇨! 말 조심하세요!"
진랑랑이 눈물을 닦으며 빽 소리를 질렀지만 장손혁은 그녀의 말은 완전히 무시했다.
"백하응이 맞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백선배님의 외손녀로 진랑랑이라 합니다."
"어제 저 영감이 죽으면서 저 꼬마를 당신한테 맡긴 것 같던데?"
진랑랑은 자신을 꼬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뺨을 복어처럼 부풀렸다. 타계한 무림 선배를 영감이라고 불러대는 불손한 태도에는 현지위 역시 화가 치솟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예, 그렇습니다.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당신의 아내이신 척린호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척린호라……. 연경 제일의 명의(名醫) 척린호를 말하는 모양이군."
"맞아요. 아저씨도 우리 할머니는 아는군요."
소매로 콧물을 닦으면서 진랑랑이 말했다,
"일단 대협과 함께 산동의 본문으로 돌아가 사제의 머리를 사부님께 바친 연후에 이 애를 데리고 연경으로 갈까 합니다."
"그거 좋소. 그럼 속히 떠나도록 합시다."
그가 하루라도 빨리 현상금을 타려고 안달을 내며 여행길을 서두는 모습을 보면서, 현지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장손혁은 결코 그냥 떠나지 않았다. 마구간에 현지위의 조랑말과 자신의 조랑말, 그리고 백하응이 몰고 온 흑마(黑馬) 외에 세 필의 말이 더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마저 남김없이 끌고 나왔다. 주방에 숨어 있던 객잔 주인은 좁다란 창문을 열고 그 꼴을 보면서 졸린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한밤의 살인극에 놀랄 틈도 없이 자정부터 새벽까지 시체를 치우고 바닥을 걸레로 닦고 나무판자로 엉성한 관을 짜고 삽질을 해서 파묻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돈을 받을 수도 없었고 감사의 인사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얻은 것은 오직 하나,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의 피곤함이었다.
"급살맞을 놈들 같으니라고."
객잔 주인은 웅얼대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주방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 노곤한 몸을 눕혔다. 손님들이 모두 죽거나 떠나가서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그는 조용히 눈꺼풀을 닫았다.
- 계속 -
- 제 1장: 철혈무쌍(鐵血無雙) (3)
빛이 있었다. 천 근 만 근 무거운 눈꺼풀을 떼니 광선이 일직선을 그리며 앞을 밝혔다. 몇 번을 깜박인 끝에야 겨우 눈을 치켜 뜰 수 있었다.
현지위는 자신이 침상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요는 딱딱했고 이불은 더러웠다. 옆에 붙어 있는 좁은 창문에서 새벽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독기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차갑게 식은 모래의 냄새가 섞인 아침 공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기(氣)를 가다듬었다. 한 숨을 들이쉬고 기를 모으고 다음 숨을 내쉬며 혈맥을 따라 기를 운행했다. 대략 밥 한 공기를 먹고 마무리로 더운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어느 정도 독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동이 튼 지 오래였다.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당장 몸을 움직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리면 독기가 들끓어 오를 것이 분명했다.
'하루라도 빨리 사문에 돌아가 독을 다스려야겠군.'
현지위는 허리를 쭉 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창문에서 바깥이 내려다 보이는 걸 보아하니 2층 객실인 듯 했다. 방은 좁고 지저분했다. 가운데 놓인 탁자에는 자신의 장검이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다.
그는 칼을 집어 허리에 차고 문을 열었다. 발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며 울어대는 좁은 낭하의 난간 아래로 식당이 보였다. 상쾌한 아침햇살에 칙칙한 마룻바닥 깊이 배인 검붉은 핏자국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리고 창가에 접한 넓고 깨끗한 자리에는 어제 현지위를 도와준 가죽옷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사내의 아침 식사는 조밥에 야채 볶음 한 접시, 미지근한 엽차 한 잔이었다. 밥과 야채를 한 입에 넣고 게걸스레 먹어대며,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선한 공기를 반찬 삼아 들이마셨다.
현지위는 계단을 내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내 앞에서 손을 마주잡고 길게 읍하며 인사를 올렸다.
"대협, 지난 밤에 상황이 급박하여 제대로 인사조차 올리지 못한 것을 사과 드립니다. 대협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죽어 백골이 된다 한들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내는 밥을 입에 넣은 채 우물대며 말했다.
"별 것도 아니었소. 나는 그저 당신 입에 구토제를 흘려 부었을 뿐이오. 하룻밤 만에 그 정도로 회복된 것은 당신이 젊고 건강하기 때문이지, 내 덕분이 아니오. 더군다나 강호란 은혜를 주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곳이오. 그러니 당신이 잊는다 해도 개의친 않겠소. 사실 죽어 백골이 된 뒤에 그까짓 은혜를 기억해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현지위는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다시 허리를 숙였다.
"대협의 큰 은혜를 입은 이놈은 현무문의 현지위라고 합니다. 대협의 높으신 이름은 어찌 되십니까?"
"나? 나는 장손혁이라 하오."
장손혁,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현지위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눈을 크게 뜨고 속으로 외쳤다.
'철혈무쌍(鐵血無雙) 장손혁(長孫赫)!'
그것은 무정하다기보다는 비정하다고 해야 마땅할 이름이었다. 잔인하진 않지만 냉혹한 이름이었다. 눈 먼 사랑에는 코웃음치고 우정의 가치는 통렬하게 비웃고 오직 주판알 튕기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타산적인 이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름 앞에 철혈무쌍이란 별호를 붙였다. 인간의 혈관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지만 철혈무쌍의 혈관에는 오직 차가운 수은(水銀)이 흐른다는 평판이 뒤따랐다.
강호의 세력 다툼에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어느 패거리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어느 문파도 도와주지 않았다.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돈이었다.
그는 살인, 강도, 강간을 저지른 중죄인, 명문 정파의 지엄한 규율을 어기고 도망친 사문난적(斯文亂賊), 관아에서 혹은 뒷거리에서 현상금이 걸린 자의 목을 가져오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냥꾼이었다. 사냥감은 살려서 데려온 적이 없었고 생포하는 일거리는 아예 맡지를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위험한 만큼 벌이가 짭짤하거니와, 발버둥치며 반항하는 인간을 끌고 오는 것보다는 그 모가지만 잘라서 들고 오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에 관한 소문을 되새기던 현지위는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혈무쌍은 아무런 이해타산도 얽히지 않은 사람을 살려줄 정도로 자비롭거나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손대협께서 저를 구해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장손혁은 엽차로 입가심을 하고 길게 트림을 했다. 그러더니 입맛을 다시며 허리를 숙여 뭔가를 집어 올렸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소이다. 실은 이것 때문이오."
어제 그가 짊어지고 왔던 봇짐이었다. 보자기를 풀어헤치니 나무 상자가 드러났다. 그는 뚜껑을 가리키며 현지위를 쳐다봤다.
"열어 보시오."
현지위는 잠시 주저하다가 뚜껑을 열어젖혔다.
코의 점막을 자극하는 곰팡내, 비린내, 썩은내가 밀어닥쳤다. 그리고 원한과 증오와 공포로 무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허윤!"
현지위는 상자가 부서져라 꽉 붙들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허윤의 머리였다. 소금에 절인 살갗은 밀랍처럼 반들거렸고 눈알이 썩어 눈꺼풀이 꺼졌고 입술은 괴상하게 일그러져 허연 이빨을 드러냈고 목이 잘린 그루터기엔 검붉은 핏방울이 말라붙었다. 하지만 형상의 참혹함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아침의 시장기조차 날려 버리는 역겨운 냄새였다.
장손혁은 뚜껑을 닫고 상자를 다시 보자기로 쌌다.
"이 머리의 값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당신이 살아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요."
현지위는 그를 마주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며 입을 열었다.
"결국 그렇게 죽었구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그는 너무나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한때 동문수학했던 사제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그가 자신이 존경하던 대사형을 해친 살수이자 죽음으로 처벌받아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은 기억에서 흐릿해지고 그에 대한 증오심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과 순결한 연민뿐이었다.
"저, 저, 뭔가 드시겠습니까?"
피로한 얼굴의 객잔 주인이 뻣뻣한 걸음으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현지위는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주인은 자신이 지은 죄를 아는지라 재빨리 등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저 사람에게 화낼 필요는 없소. 저 자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술에 독을 탔을 뿐이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 탄 것이 아니란 말이오."
이해하기 힘들지만 아주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소. 사문을 배신한 순간부터 이 자는 이미 당신의 동문이 아니었소. 지금은 은자 서른 냥짜리 고깃덩이에 불과하고."
은자 서른 냥, 현지위의 머리에서 어젯밤의 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어제 백백신교의 무리와 은자를 흥정하지 않았습니까?"
장손혁은 부인하는 대신 엽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앞뒤로 끄덕였다.
"맞소. 당신 머리에 은자 서른 냥을 불렀소."
"왜 그랬죠?"
그 질문에 장손혁은 보자기에 싼 상자를 손바닥으로 텅텅 소리 내어 두들겼다.
"보시오. 내가 가져온 이 머리는 서른 냥의 값어치가 있는 머리요. 하지만 만일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현무문에서 그 상금을 타내기란 불가능할 거요. 그래서 당신의 목에 똑같이 서른 냥의 값을 매겼는데, 백백신교인지 뭔지 하는 그 멍청한 무리들은 고작 동전 열 닢으로 타협하려 했소. 은자 서른 냥과 동전 열 닢, 바보 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쪽을 선택할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소?"
계산인즉슨 타당하지만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에 현지위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만일 그들이 은자 서른 냥을 낸다고 했으면 어쩔 셈이었소?"
그는 태연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다섯 명을 죽이는 것보다는 한 사람을 죽이는 편이 양심의 가책이 덜한 법이오."
협객의 의리나 자부심은 터럭만치도 섞여 있지 않는 말투였다. 그보다는 순진한 사람들을 등쳐서 재산을 긁어 모은 인색하고 후안무치한 수전노의 뻔뻔함이 짙게 묻어났다. 현지위는, 사부님이 사제의 목에 서른 냥이라는 막대한 상금을 건 덕분에 모가지가 날아가는 신세를 면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이런 자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한심스러워 그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둘 사이에 떠돌던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을 깬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점소이 소년이었다.
"준비가 다 됐어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쪼르르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손혁은 다시 한 번 트림을 하며 일어났다.
"자, 나가 봅시다."
현지위는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물었다.
"무슨 준비가 됐다는 겁니까?"
"장례 준비 말이오. 어제 죽은 영감의 장례는 치러야 할 것 아니오."
그제야 현지위는 백하응이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신에게 손녀딸을 부탁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선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었다.
"랑랑은 어디 있습니까?"
"일찌감치 밖에 나가 있었소. 우리도 빨리 갑시다."
장손혁은 현지위를 데리고 나가 마구간 뒤편으로 돌아갔다. 펑퍼짐하고 넓은 바위 아래, 흙을 얕게 파고 관을 넣어 흙모래와 자갈을 덮은 야트막한 무덤이 보였다. 향불조차 없는 초라한 젯상 앞에는 랑랑이 엎드려 있었다. 맑았던 눈은 슬픔에 어두워지고 귀엽던 얼굴은 초췌해지고 발그레한 뺨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지저분해졌다.
장례 준비를 어떻게 한 것인지 묻자 장손혁은 이렇게 답했다.
"어젯밤부터 주인장을 다그쳐 관을 대강 짜 시체를 넣고 묻었소."
조금 떨어진 곳에는 훨씬 넓고 높은 돌무덤이 있었다. 흙과 돌의 상태를 보아하니 갓 쌓은 무덤이었다. 장손혁은 그 무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모가지가 달아난 멍청이들은 저기 아무렇게나 파묻었소. 은자 서른 냥을 아끼던 놈들에겐 관을 짜줄 필요도 없으니까."
현지위는 인색한 수전노의 황당한 윤리관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철혈이로구나.'
세상의 끝에서 불어오는 굵은 모래가 섞인 쌀쌀한 바람이 턱밑을 핥았다. 허술한 무덤은 쓸쓸했고 칭얼대며 울어대는 어린 상주는 가련했다. 어설프게나마 장례를 마친 뒤에 현지위는 랑랑을 이렇게 위로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곳에서 할아버지를 잃는 참변을 당했으니 네 처지가 참으로 가련하구나. 하지만 아무 걱정 말거라. 이 오래비가 책임지고 너를 네 할머니에게 데려다 주마."
소녀는 훌쩍이면서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손혁은 턱을 가볍게 긁으며 현지위를 쳐다봤다.
"그런데 여기 묻힌 영감이 천리이 백하응이 맞소?"
"우리 할아버지더러 영감이라뇨! 말 조심하세요!"
진랑랑이 눈물을 닦으며 빽 소리를 질렀지만 장손혁은 그녀의 말은 완전히 무시했다.
"백하응이 맞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백선배님의 외손녀로 진랑랑이라 합니다."
"어제 저 영감이 죽으면서 저 꼬마를 당신한테 맡긴 것 같던데?"
진랑랑은 자신을 꼬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뺨을 복어처럼 부풀렸다. 타계한 무림 선배를 영감이라고 불러대는 불손한 태도에는 현지위 역시 화가 치솟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예, 그렇습니다.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당신의 아내이신 척린호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척린호라……. 연경 제일의 명의(名醫) 척린호를 말하는 모양이군."
"맞아요. 아저씨도 우리 할머니는 아는군요."
소매로 콧물을 닦으면서 진랑랑이 말했다,
"일단 대협과 함께 산동의 본문으로 돌아가 사제의 머리를 사부님께 바친 연후에 이 애를 데리고 연경으로 갈까 합니다."
"그거 좋소. 그럼 속히 떠나도록 합시다."
그가 하루라도 빨리 현상금을 타려고 안달을 내며 여행길을 서두는 모습을 보면서, 현지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장손혁은 결코 그냥 떠나지 않았다. 마구간에 현지위의 조랑말과 자신의 조랑말, 그리고 백하응이 몰고 온 흑마(黑馬) 외에 세 필의 말이 더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마저 남김없이 끌고 나왔다. 주방에 숨어 있던 객잔 주인은 좁다란 창문을 열고 그 꼴을 보면서 졸린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한밤의 살인극에 놀랄 틈도 없이 자정부터 새벽까지 시체를 치우고 바닥을 걸레로 닦고 나무판자로 엉성한 관을 짜고 삽질을 해서 파묻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돈을 받을 수도 없었고 감사의 인사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얻은 것은 오직 하나,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의 피곤함이었다.
"급살맞을 놈들 같으니라고."
객잔 주인은 웅얼대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주방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 노곤한 몸을 눕혔다. 손님들이 모두 죽거나 떠나가서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그는 조용히 눈꺼풀을 닫았다.
- 계속 -
2006/02/11 14:24
2006/02/11 14:24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오랫만에 매력있는 캐릭터, 재미있는 무협소설 읽습니다.
謝謝!
친절한:p 철혈무쌍,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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