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듣는 이름일 것이다. 이 사람에 관해 구글링을 해 보면 위키피디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와 있는 게 보인다. (위키백과: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년 ~ 1938년)는 이탈리아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아브루치의 페스카라에서 출생하였다. 카르두치의 영향을 받은 1880년 시집 <조춘(早春)>으로 인정받았다. 정력적인 작가로 시집 13권, 단편집 4권, 소설 8권, 극작 17편, 그 밖에 평론, 산문집 등이 있다. 1893년에 <죄없는 자>의 불역(佛譯)이 나와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1910년에 빚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조국 이탈리아의 참전을 주장하고 귀국, 그해 7월 의용군에 가담하여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그 이듬해 비행 중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종전 후 국제 연맹의 결정에 항의하여 피우메 시(市)를 점령하는 장거를 감행하였다. 1921년 동시를 자국군에 인계하고 귀국, 1924년 몬테 네보소공(公)으로 봉(封)하여져 파쇼 정부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1938년 가루다 호반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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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포스가 느껴지는 얼굴. 하지만 알고 보면 166cm의 루저!

흠, 시인이라. 얼굴 생김새부터 범상치 않긴 하군.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위대한 시인은 아니었던가 봐. 애꾸눈이 되면서까지 전쟁터에 나갔다니, 대단한 애국자긴 하네. 그래, 이거야말로 진정한 이태리 사람이지!
위키피디아의 인물 소개를 보고 받을 수 있는 인상은 아마 그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아, 덤으로 위키피디아의 [코르토 말테제] 항목에도 단눈치오의 이름이 실려 있다.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 중 하나인 [베네치아의 전설]에 실존 인물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확인해 본 결과, 확실히 '시인'이라고 자칭하는 인물이 잠깐 얼굴을 내밀기는 했다. 이 사람이 단눈치오일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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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전설] 중의 한 컷. 닮은 것 같기는 한데, 이름이 직접 언급되진 않는다

하지만 단눈치오가 이름을 떨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름다운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저 위의 약력에서 짧게 언급되는 "피우메 시 점령" 때문이다. 그는 전후의 혼란기를 틈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피우메 시로 진군해 들어가 그곳을 점령했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시인이 주도하는 공화국을 세웠다!
단눈치오의 이 엄청난 위업에 관해서는 [기네스북이 선정한 세계사의 대실수]라는 책에서 특별히 한 챕터를 할애하여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읽고 있노라면 경탄과, 경외와, 배꼽 잡고 떼굴떼굴 구르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솟구치는, 그런 글이다. 그런즉슨 이 즐거움을 어찌 혼자만 누리리요. 여기 실린 내용을 위주로 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단눈치오라는 인물에 대해서 널리 알리고자 하는 바이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 그는 한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악명 높은 오입쟁이이기도 했다. 시의 영감을 얻을 때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상한 방법을 동원했다. 우산을 펴놓고 그 뒤에 종이를 놓은 다음 깃펜으로 쓰질 않나, 사산아가 담긴 병을 서가에 올려놓고 있는 등, 그야말로 엽기적인 기행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이탈리아의 기성 제도에 충격을 주길 좋아했다. 그가 보기에 기성 제도는 조국의 진보에 해로울 뿐이었으니까.
그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비행기 조종사였고, 동시에 자동차 레이서이기도 했다. 일은 안 하고 취미 생활에만 열중하니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것도 당연지사. 그는 빚쟁이들의 등쌀을 피해 프랑스로 줄행랑쳐야만 했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이탈리아는 처음엔 중립을 선언했다. 연합국과 동맹국은 서로 이탈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리고 1915년,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탈리아의 참전을 열렬하게 주장했던 단눈치오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즉시 이탈리아로 귀국한 그는 의용군에 가담해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그 때 그의 나이 무려 52세! (보온 상수공, 그대도 늦지 않았소!)
나이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을 함부로 굴린 탓인지, 전쟁 중에 그는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단눈치오는 낭만적인 시인이었고 타고난 군인인 동시에…… 전형적인 이태리 싸나이였다.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등장인물들이 허수아비로 여겨질 정도로.
그는 화려한 망또를 휘날리며 양 이빨 사이에 단도를 물고 양손에는 권총을 든 채로 오스트리아 군의 참호로 돌진해 들어갔다. 부카리 만에서는 어뢰정을 몰고 오스트리아 함대 사이로 돌진해 적함을 격침시켰다.
1918년 8월 9일, 그 날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하늘에는 빨강, 하양, 녹색의 색종이가 휘날렸다. 그것은 이탈리아 공군 편대가 떨어트린 팜플렛이었는데 그 편대장이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였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시내에 떨어진 색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빈 시민들이여. 우리는 지금이라도 폭탄을 떨어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인사를 보낸다'

아마도 단눈치오에게 있어서 전쟁은 사나이의 로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가장 적합한 시공간이었으리라. 실제로 그는 "전쟁이란 건 장군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글쎄,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시인들한테 맡길 순 없는 노릇이잖아?

 1918년, 참혹했던 전쟁이 끝났다.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는 단눈치오에게 크나큰 좌절을 안겨줄 따름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신문에 이름이 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기 과시욕에 충만한 인간이었으니까.
단눈치오는 열심히 탐색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또 다른 전쟁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사냥감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피우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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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메 지도 - 아드리아해에 접한 항구 도시란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피우메는 오늘날 리예카라 불리는 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다. 하지만 1차 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육지와 아드리아 해를 잇는 항구였고 이탈리이아와의 접경 지대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많은 이탈리아 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피우메를 집어삼키기 위해 무진장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5년의 참전 협약에서도, 1918년에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맺은 휴전 조약에서도, 피우메의 소유권은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비록 이탈리아 군대가 진주하긴 했지만 연합군의 일원으로 영국군, 프랑스군과 함께 진주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탈리아인들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우리가 피 흘려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다니, 이런 병신 같은 정치가들을 봤나! 그것이 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리라.

단눈치오는 이런 분위기를 재빨리 간파했다. 그리고 "피우메는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만일 그가 정치가였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 걸로 끝났으리라. 하지만 그는 시인이었다. 낭만적이면서도 애국적이고, 바이런처럼 행동할 줄 아는, 그러나 반쯤 맛이 간 시인…… 그리고 그는 움직였다. 완전 무장한 2,000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피우메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 전, 붉은 셔츠단과 함께 나폴리로 진군한 가리발디를 방불케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이탈리아 정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사실 이탈리아 정부는 피우메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당시 진행 중이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참전 댓가로 피우메를 얻기 위해 외교적으로 무진장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겨우 일이 잘 되려는 참에, 단눈치오가 대형 사고를 친 거다. 감히 연합군이 점령하고 있는 도시로 쳐들어 가다니! 이 무모한 도발은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공든 탑이 통째로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피우메 주둔군 사령관인 피탈루가 장군에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단눈치오와 그 추종자들이 나타나면 발포하라!"

1919년 9월 12일, 드디어 단눈치오가 피우메에 입성했다. 그 장면은 필름에 담겨 이탈리아 전역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필름이 아직껏 남아 있다면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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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눈치오를 환영하는 피우메 시민들의 사진 (이 뒤에 벌어질 일은 미처 상상도 못한 채)

영국 주둔군이나 프랑스 주둔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갈 몸, 공연한 싸움에 휘말릴 필요 없이 적당히 물러서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피탈루가 장군의 이탈리아 군의 사정은 달랐다. 이미 발포 명령도 받았겠다, 호락호락 길을 내줄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눈치오는 낭만적이면서 애국적인 시인인 동시에…… 쇼맨쉽으로 똘똘 뭉친 연기자였다.
그는 피탈루가를 찾아가 의용군에 합류할 것을 종용했다. 피탈루가 장군은 거절했다. 그러자 단눈치오는 외투를 벗어제치고 가슴팍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을 보여주며 당당하게 외쳤다.

"장군,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나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뿐이오!"

그것은 칸느 영화제 주연상이 아깝지 않을 완벽한 연기였다. 피우메 시민들은 좋아라 날뛰었다. 이탈리아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단눈치오의 의용군에 합류했고, 합류하지 않은 군인들은 다른 연합군과 함께 피우메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피탈루가 장군이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단눈치오는 피우메에 자신을 '영도자(Duce:두체)'로 하는 독립 정부를 세웠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리고 피우메를 이탈리아 정부에 양도하는 데 성공했다면, 단눈치오는 아마도 가리발디 못지 않은 영웅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 우라지게 불행한 일이지만 - 이 뒤에 이어진 것은 영웅적 서사시가 아니라 싸구려 희가극이었다.

단눈치오의 정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국제적이면서도 급진적이었다. 정부 구성원은 미국 저널리스트, 시인, 벨기에 작가, 이태리 사업가, 노조지도자, 무정부주의자, 군인, 기타 등등, 중국집 짬뽕이 무색하리만치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당대 최고의 급진주의적인 정부였던 소비에트 연방 정부도 이보다 더 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어쨌든 피우메 정부 조직은 나폴레옹 헌장에 기초하고 있었고, 경찰 조직도 겉보기에는 그럴싸했다.
문제는 그 뒷면이었다.
단눈치오는 멋지고 낭만적인 말투로 피우메를 "미덕의 공화국"이라고 선언했지만, 현실 속의 피우메는 그렇게 멋들어지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은 도시였다. 굳이 말하자면, 뭐랄까, 소돔과 고모라에 가까운 도시였다. 당시 떠도는 말에 따르면 '피우메는 매음굴, 범죄자와 창녀를 위한 탈출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수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피우메로 몰려들었다. 겉으로는 위대한 영도자, 단눈치오 밑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피우메에서 행한 것은 미덕의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1) 자유 연애 2) 술 3) 담배 4) 마약이었다.
단눈치오의 추종자를 자청하는 젊은이들은 검은 셔츠를 입었다. 나중에 뭇솔리니가 베껴 먹는 그 검은 셔츠 말이다. 어깨에는 해골과 뼈가 그려진 기장을 달고 허리에는 단도를 찼다. 음, 이건 히틀러가 베꼈던가? 아무튼 그들은 그렇게 폼 나는 차림새를 하고 길거리를 행진하며 "에이아 에이아 알랄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단눈치오 왈, 아킬레스가 마차를 타고 말몰이를 할 때 그렇게 외쳤대나 뭐래나……

국제 사회는 격분했다.
한 무더기의 얼간이, 실업자, 불한당(및 알콜 중독자와 약쟁이)들을 데리고 영도자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단눈치오를 당장 피우메에서 쫓아내라면서 이탈리아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단눈치오는 단호하게 저항했다.

"위대한 시인 밀턴의 나라 영국은 시인이 다스리는 공화국을 절대로 폭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영국은 시인의 나라도 아니었고 신사의 나라도 아니었고 필요할 때면 과감히 폭력을 휘두르는 패권 국가였다. 단지 '미덕의 공화국'에 폭탄을 쏟아부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쨌든 한 관찰자는 당시 피우메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광란의 기간이었다. 술의 신 바쿠스가 지배했고, 사방에서 총 쏘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섹스의 교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단눈치오는 피우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 늦게까지 일하겠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에 그는 '릴리 드 몬트레소르'라는 술집 출신의 여가수와 질퍽하게 놀아나느라 바빴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는 위대한 영도자의 궁전에 몰래 들어가 아침이 되어서야 빠져나왔다고 한다.
영도자가 그 모양이니 추종자들이야 오죽하리오. 모두가 향락에 빠져들었고 도시의 행정은 엉망진창이 됐다. 행정부에선 돈을 마구잡이로 지출했다. 곧 식량이 떨어지고 물가가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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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도자 단눈치오의 전신상이 들어간 피우메의 우편엽서(1921년)

그쯤 되자 단눈치오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조치가 필요횄다. 그래서 구이도 켈레르가 이끄는 독립 부대가 나섰다. 그들의 별명은 '속옷도 안 입는 사람들' - 뭔가 깊은 뜻이 담긴 중의적인 표현이냐고? 천만의 말씀. 웃통을 홀랑 벗어던지고 길거리를 행진하는 전통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거다!
이들은 피우메의 공중 도덕을 향상시키기 위한 불침번을 자처했다고 한다. 뭐? 웃통도 까고 다니는 변태 새끼들이 공중 도덕을 운운했다고? 믿겨지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을 어쩌리오.
그러나 아무리 찌질해 보이는 변태들이라 할지라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대원칙까지 모르는 얼간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피우메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영도자의 개인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단눈치오는 몬트레소르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피아니스트인 루이사 바카라와 놀아나고 있었다. 감히 위대한 영도자의 거시기…… 아니,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다니! 요망한 암컷 같으니라고!

켈레르와 그의 부하들은 루이사가 없어져야 단눈치오가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정치가나 군인이라면 암살을 계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낭만적이면서도 애국적인 시인이자, 전쟁 영웅이자, 쇼맨쉽으로 똘똘 뭉친 연기자이자, 피우메의 영도자인 단눈치오의 부하들이었다. 즉, 그들 역시 전형적인 이태리 싸나이들이었다.
여자를 죽이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정치적 행동에도 낭만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사나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 그들은 루이사를 죽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단눈치오의 눈앞에서 화려한 축제를 열고, 축제 도중에 루이사를 납치해 멀리 떠나보내기로 했다. 이른바 [사랑의 축제] 프로젝트였다.
그 내용인즉슨 이러했다. 먼저 루이사를 포함한 피우메의 아름다운 여자를 전부 모아 나무로 만든 성에 가둬 놓는다. 음식과 돈, 그리고 꽃도 함께 넣어 둔다. 그리고 남자들이 떼지어 몰려가 그 성을 포위하고 여자(와 돈)을 쟁탈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단, 전투가 최고조에 달하기 직전에 루이사를 성에서 빼내 멀리 외국으로 보낸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황당한 계획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단눈치오가 이 얼빠진 축제를 개최하게 내버려 두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단눈치오는 역시 단눈치오였다. 그는 흔쾌히 축제 개최를 승인하고 직접 참가하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루이사 납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단눈치오가 갑자기 싫증을 내고 도중에 축제를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영도자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엔 다들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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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도자의 초상이 들어간 피우메 우표(1920)
좌우에 인쇄된 라틴어 문구 "HIC MANEBIMUS OPTIME"는
"우린 여기 즐겁게 머물리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과연!

제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일지라도 매일같이 반복되면 물리는 법이다. 술과 여자와 마약으로 뒤범벅이 된 얼빠진 일상을 뒤로 한 채 피우메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시민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선포되는 포고령에 신물을 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단눈치오는 음악에 대한 숭배를 선동하고 나섰다.

"위대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모양을 가진 신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신에 대한 찬가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는 살아 있는 신으로 떠받들어진 로마 황제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눈치오 자신은 165센티의 단신인데다가 대머리에 애꾸눈이었고 주먹코를 한 땅딸보였다. 그런 모습의 신을 상상하노라면 신앙심이 날아가기엔 충분하리라. 하물며 찬가라니! 그쯤 되면 다들 무신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어느 때인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단눈치오는 1만명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극장을 만들겠노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침묵만이 흘렀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의용군의 핵심 멤버들은 어젯밤의 과도한 술과 마약과 여자 때문에 잠을 처자느라 바빴다. 몇몇 그룹은 상인들에게서 보호세를 뜯어냈다. 부두에서 창녀촌을 경영하는 자들도 있었다. 경찰 조직은 이미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종말이 다가왔다.
1920년 11월, 이탈리아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라팔로에서 협정을 맺고, 피우메를 국제연맹의 관할하에 독립시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는 피우메로 들어가는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누가 보기에도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건 분명했다. 아무리 용감하고 훌륭한 군대라 할지라도 제복과 군화를 뜯어먹고 살 수는 없다. 하물며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의용군이야 오죽하리오. 그들의 기강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이태리 산적떼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고, 곳곳에서 탈영병이 속출했다.
그리고 12월 24일,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피우메 항구를 봉쇄하고 있던 이탈리아 해군 함대에서 포격을 가한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눈치오는 낭만적이면서 애국적인 시인인 동시에 쇼맨쉽이 뭔지 아는 연기자였고 위대한 영도자이기도 했다. 영도자는 도망칠 때도 당당해야 하는 법,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피우메 시민들은 내 위대한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글쎄, 그의 사상이 위대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단눈치오는 그 말을 남긴 채 피우메를 떠났다. 그리고 피우메 시민들은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물론 단눈치오의 위대한 사사상은 철저하게 배제된 정부였다.

아마 단눈치오 자신은 피우메 진공을 반쯤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그리고 반쯤은 재미삼아 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수한 애국주의에서 출발한 그의 행동은 위험천만한 파시스트인 무솔리니에게 정치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무솔리니는 단눈치오의 의용군을 베껴 '검은 셔츠단'을 창설했다. 그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머리엔 피마자 기름을 발라 넘기고, 로마식 경례를 하며, 정치적 반대파에겐 가차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1922년,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절대 권력을 잡고 이탈리아 왕국의 영도자(Duce)가 되었다.
그 때 단눈치오는 병상에 누운 채 꼼짝달짝 못하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이 있기 직전, 정체 모를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창문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여자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인 원한 때문인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정신적 지주인 단눈치오를 깍듯하게 예우해 줬다. 1924년에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는 단눈치오를 몬테네보소 공(Principe di Montenevoso)에 봉했다. 그 해에 이탈리아는 피우메를 공격해 함락하고 이탈리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1937년, 단눈치오는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의 학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위를 오래 누리기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다. 이듬해인 1938년, 단눈치오는 가르도네 리베라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비록 단눈치오가 무솔리니와 정치적 성향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에겐 권력욕이란 게 없었다. 그는 순수한 애국자였고, 순수하게 객관적인 시각에서 국제 정세를 보는 눈도 있었고, 나치 독일의 위험성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1933년, 그는 무솔리니에게 히틀러와 동맹을 맺지 말 것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1934년에는 히틀러를 풍자하는 팜플렛을 배포했고, 1937년에 무솔리니와 만났을 때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히틀러와의 동맹을 파기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듣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한참 뒤인 1944년에 이르러서야 "단눈치오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게 내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땐 모든 게 늦은 뒤였다. 1945년, 무솔리니는 공산주의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7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피우메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귀속되었다. 그 이후 유고 연방의 해체를 거쳐, 오늘날 피우메는 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 '리예카'가 되었다. 한때 그 도시에 단눈치오가 영도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진공은 낭만적 애국주의에 물든 사나이들이 펼친 유쾌한 에피소드로 남을 수 있었다. 비극적인 에피소드로 점철된 역사책 속에서 하나의 희가극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는 낭만이 끼어들 여지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의 피우메 진공은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당한 끝에, 두 번 다시 인용되어선 안 될 사건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단눈치오가 낭만적이면서도 애국적인 시인이자, 전쟁 영웅이자, 쇼맨쉽으로 똘똘 뭉친 연기자이자, 피우메의 영도자였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가 진정한 이태리 싸나이란 사실엔 전혀 변함이 없단 말이다!

- DJ.HAN -

2011/06/26 13:04 2011/06/26 13:04

지금, 시장에는 아이폰용 케이스만큼이나 아이패드용 케이스도 많이 나와있다.

하지만 별다른 공식 액세서리가 없던 아이패드 1과는 달리, 애플은 아이패드 2와 함께 스마트커버라는 공식 액세서리를 발표했다. 앞면을 보호하고, 내장된 자석으로 온오프가 가능하다고, 간이 받침대로도 쓸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스마트커버는 반드시 구입해야 할 필수 액세서리로 손꼽히고 있다.

스마트커버의 단점이라면, , 가격이다. 폴리우레탄 재질의 커버는 4 9천원, 가죽 재질의 커버는 9만원이다. 아무래도 싼 가격은 아니다. 이 돈이라면 좀 더 좋은 다른 케이스를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이패드 2를 구입하면서 스마트커버 대신 이걸 샀다. 트라이디어의 아이패드 2용 스탠딩 폴더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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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트라이디어의 아이패드 1용 스탠딩 폴더 케이스는 이미 1년 가까이 사용한 경험이 있었다. 매우 튼튼하고 실용적인 케이스였다. 그래서 아이패드 2용 케이스는 이 회사 걸로 구입해야겠다고 마음먹은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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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2용 스탠딩 폴더 케이스는 1용과 디자인이 거의 비슷하다. 아이패드의 뒷면을 덮고, 모서리 4군데를 고정해서 붙잡고, 전면의 커버를 여닫는 방식이다. 재질은 폴리우레탄과 가죽으로 1용과 동일하다. 상당히 고급스럽고, 안정감이 있다.

그리고 스피커 구멍을 막지 않도록, 케이스 내부 중심을 높여서 아이패드가 살짝 뜨도록 되어 있다. 이 안에는 충격 완화재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또한 옆쪽과 아랫쪽에 가방끈이나 스트랩 등을 연결할 수 있는 쇠고리가 끼워져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뒤쪽에는 카메라 구멍이 뚫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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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를 끼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일단 안쪽의 2군데 물리는 부분에 끼워넣고, 신축성 재질의 밴드를 잡아당겨 끼우면 끝이다. 그러면 아주 단단하게 고정된다. 다시 빼려면 신축 밴드 2개를 다 풀어야 빠진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힘을 줘도 절대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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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식의 장점은 1) 플라스틱 고정쇠로 물리는 방식처럼 케이스에 흠집을 줄 염려가 전혀 없고 2) 베젤을 감싸는 방식처럼 스와이핑을 할 때 손가락이 베젤 고정부에 부딪혀 걸리적거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 밴드가 스피커 부분과 잠금 버튼 부위를 살짝 가린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앞면 커버는 아이패드의 유리면을 확실하게 덮어 준다. 단점이라면 스마트커버나, 다른 케이스와는 달리, 앞면 커버에 자석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얇은 자석 하나만 넣어놨어도 자동 온오프 기능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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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딩 폴더라는 이름 그대로 세워서 쓰는 것도 가능하다. 커버 벨트를 뒤로 돌려서 끼워서 가로로 세우면 꽤 단단히 고정된다. 이 이상 높은 각도로 세워볼 수는 없다. 어차피 개인적으론 세로로 적당히 벽이나 파티션에 기대 세워서 쓰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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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리에 별도로 판매되는 가죽끈(3만원)을 연결해 가방처럼 메고 다닐 수도 있다. 가격이 좀 비싸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만듦새가 좋다. 하지만 굳이 이 가죽끈 아니라, 다른 가방끈을 연결해서 쓴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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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케이스의 가격은 8 9천원, 좀 비싼 것 같다고? 하지만 가죽 재질 스마트커버에 비하면 불과 천원 비쌀 뿐이다. 그러면서도 앞뒷면을 다 보호하고, 스탠딩 기능도 제공해 준다. 재질감도 고급스럽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강점은, 이게 메이드 인 코리아란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싸구려 중국산 케이스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마감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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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점 : 8/10 (자석 부재와 제한된 스탠딩 기능으로 2점 감점)

결론 :
아이패드 2의 앞뒷면 모두를 보호하는 케이스를 찾는다면, 구입할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이다. 아, 뭐, 물론 그보다는 스마트커버와 후면 커버의 조합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이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다양성과 가능성으로 넘쳐나고 있으니까!

2011/06/02 16:24 2011/06/02 16:24
"예전에 카 오디오가 한창일 시절, 대만이 한국보다 인건비가 쌌지. 도저히 가격면에서 경쟁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알아? 제품 라인을 한두 개로 줄이는 대신에 생산 물량을 늘려서 가격을 낮췄지. 그랬더니 바이어들이 다 우리나라로 몰려오더라고."
 - 80년대 잘 나가는 전자제품 세일즈맨이셨던 아버님의 회상


1.
얼마 전, 애플이 삼성을 특허 침해 혐의로 고소했다. 삼성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는데, 삼성에선 의외로 빠르게 반격에 나섰다. 즉, 며칠 지나기도 전에 애플을 특허 침해 혐의로 맞고소해 버린 것이다.

겉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만 보면 요즘 스마트폰 업체에 횡행하는 묻지마 고소와 맞고소의 사례 중 하나일 따름이다. 하지만 애플과 삼성의 관계는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다. 삼성에게 있어서 애플은 최대의 고객이며, 애플에게 있어서 삼성은 주요 부품 제작사다.
하지만 둘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그 전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이미 올 초부터 애플이 CPU 생산을 TSMC로 위탁할 거란 얘기가 흘러나왔고, 엘피다나 도시바에 메모리 증산을 의뢰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애플이 쉽게 생산 라인을 바꾸지 못할 것이며, 삼성전자 만큼의 생산력을 갖춘 업체도 찾기 힘들 거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설령 애플이 삼성과 거래를 끊는다고 해도, 2011년 매출 목표를 2천억 달러로 잡은 삼성전자에게 있어 80억 달러 수준의 애플과의 거래 중단이 심대한 타격이 될 리 없다는 전망도 있다. 진상이야 어쨌든간에 애플과 삼성은 한가지로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다.


2.
그런데 여기서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는 건 애플이 장사하는 방법이다.

다들 잘 알다시피, 애플은 컴퓨터 업계에서 오랫동안 마이너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다. 특히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애플은 아미가나 아타리처럼 조만간 망해 자빠질 업체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맥 매니아들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상하기까지 한 MacOS가 몰락하는 걸 슬퍼하고, 형편없이 구질구질한 MS 윈도우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는 부조리한 현실에 한탄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애플이 MS처럼 OS 라이센스 사업에 뛰어들었더라면 진작에 큰 성공을 거뒀을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주장이었다. 1984년 맥이 막 등장했을 무렵 선보인 애플리케이션은 메모장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워드 프로세서인 MacWrite와 흑백의 페인팅 프로그램인 MacPaint, 기타 자잘한 액세서리가 고작이었다. IBM PC의 킬러 앱이었던 Lotus 1-2-3 같은 건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1985년에 MS가 맥용 워드와 엑셀을 내놓긴 했지만, 이미 엄청난 생태계를 구축한 PC 환경을 쫓아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은 90년대에 들어가면 더욱 심화된다. MS는 윈도우를 발표하고 윈도우용 워드와 엑셀 등을 묶어 오피스 패키지로 판매하고 꾸준한 업그레이드를 약속했다. 하지만 맥용 워드나 엑셀은 찬밥이었다. 맥의 무기는 어도비 포토샵과 쿽 익스프레스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맥이 공략할 수 있는 시장은 DTP 시장 정도밖에 없었다. 결국 애플은 틈새 시장에 비싼 가격으로 맥을 팔아 회사의 생명력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도비와 쿽이 윈도우 용 프로그램을 내놓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배경음악 : 한국 실사판 [북두의 권] 주제가). 맥은 틈새 시장에서조차 설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일부 정신나간 마니아들이나 쓰는 컴퓨터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잡스가 돌아온 이후의 변화 중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애플이 틈새 시장보다 일반 소비자 시장의 공략에 주력하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맥은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 시장엔 델이나 HP, ASUS. 레노보/IBM 처럼 쟁쟁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틈새 시장에서 높은 마진을 붙여 비싸게 제품을 팔던 회사가 경쟁하기엔 버거워 보이는 시장이었다.
이 때 애플이 선택한 전략은 단순했다. 제품 라인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대신 부품 발주량을 늘려 단가를 낮춰 최종 제품 가격을 떨어트린 것이다.
사실 반쯤은 미친 짓이었다. 레노보나 델, HP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여느 컴퓨터 회사는 최소 2, 30종의 제품 라인을 갖추고 있다. 롱테일, 숏컷, 귀요미, 어벙이, 똑똑이, 잘난이 등으로 걸그룹을 꾸리면 그 중 하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란 걸그룹 전략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제품을 시장에 많이 깔아놓으면 그 중 하나는 팔릴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아이맥이 실패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뒤엎고 아이맥은 보란듯이 대히트를 쳤다. 물론 전체 PC 시장의 판도가 뒤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견고한 생태계를 구축한 x86 기반의 윈도우 PC가 장악한 시장에서 맥은 여전히 소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전략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는 게 입증되었다. 그리고 2001년, 그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게 아이팟이었다.

여태껏 아이팟의 성공 비결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어왔다.
첫 번째로 거론된 것이 아이튠즈와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다. 흠, 확실히 아이튠즈는 괜찮은 프로그램이고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iTMS)는 달리 비견할 바 없는 훌륭한 음악 마켓이다. 하지만 아이튠즈가 모두에게서 환영받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태그 정리 방식보다 폴더 방식이 훨씬 편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아이튠즈를 혐오하는 수준을 넘어 증오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까. 게다가 iTMS가 아이튠즈에 들어간 건 2003년도의 일이었다.
두 번째, 디자인은 어떨까. 흠, 흠, 글쎄, 뭐랄까, 2001년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는 클래식 아이팟의 디자인은…… 담뱃갑을 짓누른 듯 밍숭맹숭 심심하기 짝이 없다. 얼마나 구렸던지, 첫 등장 당시 PC 매거진의 리뷰에서도 디자인에 관한 언급은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http://www.pcmag.com/article2/0,2817,19362,00.asp ). 사람들이 아이팟 디자인에 열광하게 된 건 2004년도에 미니, 2005년도에 나노가 발표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뭐냐, 뛰어난 사용자 경험(UX) 때문이냐? 애플 제품이라면 환장하는 마니아들 때문이냐? 애플 스토어 때문이냐?
아이팟의 성공 비결을 딱 한 가지로 요약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모두 다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애플 아이팟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누가 뭐래도 가격이다.

2001년도에 애플 아이팟이 처음 등장했을 때, 5GB 하드 디스크를 탑재한 기본 모델의 판매가는 399달러였다. 당시 북미 MP3 시장의 1인자였던 크리에이티브의 대표적인 대용량 MP3 제품은 노매드 쥬크박스. 이건 6GB 하드 디스크를 탑재한 휴대용 CD 플레이어였다. 흠, 용량도 크고 CD 재생도 된다는 게 마음에 드네. 근데 가격은? 500달러였다.
경쟁제품에 비해 기능은 좀 처지지만 용량대비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는 것이 아이팟의 최대 강점이었다.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이팟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착실하게 올라갔고 크리에이티브나 샌디스크, 아이리버의 점유율은 확실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다들 잘 아는 아이팟 나노가 발표된다. 하드 디스크가 아닌 플래시 메모리 기반의 아이팟 나노는 곁눈질로 보기만 해도 뒤집어질 정도로 얇고 쌈빡한 MP3 플레이어였다.
나노 발표 이틀 전, 아이리버는 회심의 역작인 U10을 발표했다. 새끈한 디자인에 혁신적인 디클릭 유저 인터페이스를 채택하고, 아이팟 나노와 마찬가지로 플래시 메모리를 탑재한 제품이었다.  1GB 모델의 판매가는 33만 9천 원, 다른 경쟁사 제품보다 살짝 비싼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잘 팔릴 거라고 생각했다. 뭐가 어쨌든 MP3 종가 아이리버의 신제품 아니란 말이더냐.
그랬는데…… 아이팟 나노 2기가 모델의 미국 판매가는 199달러, 한국 판매가는 23만원이었다! 오, 하느님 맙소사. 게임 오버, 다스 엔데, 오와리데스, 쫑났심더!
그리고 대한민국의 MP3 플레이어 시장은 열심히 팩토리를 세우며 시즈탱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리버 드롭을 당한 테란 본진처럼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MP3 플레이어 종주국이랍시고 콧대를 높이 세우던 한국이 그 꼴이 됐으니 다른 나라야 말해 무엇 하리오.


3.
삼성전자가 반도체 분야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과감한 선행 투자였다. 남들이 주저할 때 돈을 쏟아부어 반도체 공장을 짓고, 설비를 들여오고, 무지막지한 양의 물량을 쏟아내 가격을 극단적으로 낮춰, 경쟁사를 압도한 것이다.
기술력이란 건 중요하긴 하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어차피 반도체 생산 장비는 거의 대부분이 일제, 미제, 유럽제다. 삼성전자는 누구보다 빨리 최신예 장비를 들여와 효율적인 생산 라인을 구축해서 경쟁 우위에 선 것이다.
거꾸로 말해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앞지르려면, 삼성전자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해 조금 더 규모가 큰 생산시설을 꾸리고 조금 더 싸게 반도체를 찍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밥 아저씨의 말투로) 어때요? 참 쉽죠?

……빌어먹을, 삼성전자만큼 투자하기도 쉽지도 않은데 그거보다 더 많이 투자하라고? 너 미친 거 아냐? 차라리 로또 1등 당첨되는 편이 훨씬 쉽겠다.

그렇다. 여태까진 그랬다. 삼성전자를 능가하기는커녕 그만한 투자 여력을 갖춘 회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애플이란 변수가 끼어든 것이다.

뉴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됐지만 지금 애플의 현금 보유액은 엄청나다. 어림잡아 500억 달러는 될 거라고 한다. 삼성전자의 2011년도 매출 목표의 1/4을 빳빳한 딸라로 가지고 있단 얘기다.
애플의 2011년도 1분기 아이폰/아이팟 터치/아이패드 판매량은 대충 다 합쳐서 2천 5백만 대 정도가 될 걸로 예상된다. 1년이면 약 1억 개다. 애플 CPU의 단가가 대충 25달러에서 30달러라고 추정되니까, 애플에 CPU를 납품하는 AP 파운드리 업체는 애플과의 거래만으로도 1년간 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와!). 게다가 애플은 이 돈을 째째하게 어음으로 주지 않는다. 항상 현금이다(꺄아!). 아예 처음부터 상당한 액수의 돈을 선금으로 주면서 공장부터 지으라고 재촉하기도 한다(이얏호!!!).
요컨대 애플과 거래하는 업체는 순식간에 막대한 투자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만일 애플이 CPU나 메모리 거래선을 확대하면서 TSMC나 엘피다에 거액의 선금을 지불한다면 - 이들 업체는 당장 미친듯이 생산 라인을 늘릴 거다. 그것도 최신예 장비로 도배를 해서.
애플이 거래처를 옮기면 삼성전자에 당장 큰 타격이 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경쟁자들이 일거에 급상승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잠재적인 경쟁자들이 생기거나 말거나, 애플이 등을 돌리거나 말거나, 그런 거하곤 상관 없이 삼성전자는 반도체는 물론 프리미엄급 스마트폰과 타블렛과 컴퓨터와 TV를 전세계 시장에 계속해서 팔아치우며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거다. 그럼 된 거 아냐?
맞다. 얼핏 보기엔 그것도 괜찮아 보인다. 문제는, 음, 역시 가격이다.


4.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를 하겠다.
애플은 확실히 정신나간 회사가 맞다. 쓸데없이 디자인에 집착하느라 미친 짓을 벌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폰 4는 제조 공정의 복잡성을 감수하고서라도 미친듯이 나사를 남용하질 않나, 아이패드는 배터리를 고정하는 데 양면 테잎을 쓰질 않나, 맥용 키보드는 상판과 하판을 무식하게 접착제로 붙이질 않나…… 하여간 다른 제조업체에선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거리를 태연하게 남발한다.
그 중에서 최고 압권은 아마 애플 제품의 알루미늄 케이스일 것이다.
알루미늄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 표면에 산화 피막을 입히는데, 이걸 아노다이징 처리라고 한다. 그런데 알루미늄 원색으로 아노다이징을 하면 미묘한 환경 변화에 따라 처리후 색깔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지인 중에서 알루미늄 케이스 생산에 도전한 사람이 있었는데, 원색 케이스 생산은 이런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판과 하판의 색깔이 일치하지 않는 불량률이 거의 30%에 육박한 것이다. 그 대신 검은색 알루미늄 케이스를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검은색 아노다이징 처리는 변색의 우려가 없어 불량률이 거의 없고, 결과적으로 단가가 대폭 저렴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대부분의 업체들이 알루미늄으로 외장 케이스를 만들 때 검은색으로 만드는 쪽을 선택한다.
하지만 애플은 그냥 원색으로 해 버렸다. 뭔가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냐고? 아니, 그런 거 없다. 정해진 색깔에서 벗어나는 건 그냥 아웃시키는 거다. 그게 전부다. 한마디로 말해 돈지랄을 한 거다.

최근에 삼성전자에서 나온 소위 "맥북 에어 킬러"라는 센스 9 노트북은 외장 케이스 소재로 듀랄루민(알루미늄 합금)을 썼다. 근데, 그 색깔은…… 그렇다, 검은색이다. 그리고 11인치 제품 국내 출시판은 128기가 SSD를 탑재하고 있는데, 비슷한 사양의 맥북 에어 11인치와 가격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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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돌이" 삼성전자 센스 9

  • 애플 맥북 에어 : 155만원
    - Core2Duo 1.4Ghz / 2GB RAM / 128GB SSD
  • 삼성 센스 9 : 179만원
    - i3 380UM 1.33Ghz / 2GB RAM(?) / 128GB SSD

이봐, 샘숭, 넌 뭘 믿고 나한테서 24만원이나 더 뜯어가려는 거야? 그놈의 졸라 파랗고 촌시런 샘승 로고가 벌레 먹은 사과 로고보다 24만원은 더 가치 있다고 외치고 싶은 게냐? 아니면 검은색이 더 비싸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냐? 내가 검은색 아노다이징이 원색보다 훨씬 더 싼마이란 것도 모르는 머저린 줄 아냐?

애플은 스위스 은행 못지 않게 쌓아둔 현금을 무기로 삼아 전세계 부품 업체들과 유리한 게임을 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애플과 거래하려는 업체들은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다. 애플에 부품을 납품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선전이 될 수 있거니와, 단번에 막대한 현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 보기엔 미친 짓도 태연하게 행할 수 있다. CEO인 잡스란 놈부터 살짜쿵 맛이 간 놈인데, 그 밑의 놈들이야 오죽하겠냐.

그러나 삼성전자는 사정이 다르다.
애플처럼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제품 라인을 대폭 줄이고 소품종 대량 생산으로 부품 단가를 극한까지 떨어트려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을 무작정 따라할 수 없는 입장이다. 누가 뭐래도 삼성전자는 매 분기마다 세계 각지의 시장에 현지화된 제품을 뿌려대는 데 익숙해져 있는 글로벌 가전회사다. 제품 종수를 함부로 줄이면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도 어렵거니와, 단 하나의 제품 실패로 회사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 그런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굳이 따라할 이유가 없잖아?

CPU나 메모리, LCD 등을 내부에서 만든다고 해서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보장할 순 없다. 때로는 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지금 삼성 고가 스마트폰을 대표하는 AMOLED, 이건 가격도 지랄맞게 비싼 데다가 수율도 낮다. 외부 업체에서 AMOLED를 쓰려고 하면 "너네 X만 개는 주문할 거냐?"란 빈정거림이나 듣기 일쑤다. 그러는 사이에 LCD는 AMOLED만큼 얇아지고 전력소비량이 줄어들고 화소수는 대폭 늘어났다. 대다수 업체들이 LCD를 선택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삼성은 AMOLED를 미래 기술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사 제품에 계속 AMOLED를 탑재하며 관련 기술을 습득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만큼 원가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뭐, 그래도 맥북 에어의 알루미늄 케이스보다는 수율이 높겠지.


5.
삼성과 애플 간의 소송이 뭘 뜻하는 것일지 밖에서 판단하긴 쉽지 않다. 정말로 둘 사이의 관계가 파탄난 것인지, 아니면 앞에선 소송을 하면서 뒤에선 모종의 협상을 진행 중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법무팀의 똘아이들이 사고친 건지, 도대체 누가 알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별로 중요치는 않을 것이다. 기업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건 소송이 아니다. 가격이다.

경쟁사 제품과 비슷하거나 우월한 제품을 보다 저렴한 가격에 내놓는 것이야말로 승리를 약속하는 열쇠다. 애플이나 삼성이 각자 자신들의 전략을 유지하며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관전 포인트인 것이다.

근데 서두에 언급한, 한때 잘 나가는 카 라디오 세일즈맨이었던 아버님의 회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 : "그래서 어떻게 됐죠? 한국 회사들이 카 라디오 업계를 휘어잡았나요?"
아버님 : "아니. 한국이 인건비가 너무 올랐어. 결국엔 대만이 다 휘어잡더라고."
나 : "……엥?!"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대만의 시대가 아니다. 중국의 시대다.
당장 알리바바 닷컴을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10인치 LCD에 1Ghz CPU를 얹은 중국제 안드로이드 타블렛의 도매가는 200달러 이하, MOQ는…… 어라, 20대부터네. 젠장, 회사 때려치고 이거나 팔아 봐?
뭐? 애플이나 쌤숭을 80년대 한국의 코딱지만한 오디오 메이커와 비교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봐,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금의 중국 업체들도 80년대 대만의 코딱지만한 오디오 메이커와는 급이 다르긴 마찬가지잖아!
2011/05/11 00:44 2011/05/11 0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