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길 1-5권

만화비평 | 2004/06/15 02:36 | djhan
태국과 미얀마(버마), 프랑스와 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한국과 일본은 지독한 웬수 사이다. [옹박]에서 주인공의 최대 맞수가 미얀마 인으로 나왔듯이, [쟈니 잉글리쉬]에서 프랑스 인이 최대 악당으로 등장했듯이, 대다수 한국 만화나 영화에서 최고 악역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일본인일 수밖에 없다.

그런 한국의 만화가와 일본의 스토리 작가가 손을 잡고 그린 만화가 [푸른길]이다. 그림은 권가야, 글은 에도가와 케이시.

밑바닥엔 양국간의 애증의 역사를 깔았댄다. 이거 장사 될 거 같다.
잔혹한 연쇄살인 사건을 집어넣었단다. 이게 또 잘 팔리는 소재 아닌가.
게다가 정치 스릴러이기도 하댄다. 도무지 망할 리가 없어 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는 엄청나게 형편없다. '쓰레기'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하니 개쓰레기 내지는 상쓰레기라 불러야 마땅하다. 대체 왜?

일단 스토리나 설정 자체가 개판 3분 후다. 역사를 바닥에 깔려면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는데, 이 스토리 작가는 영 아니올시다 수준이다.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항왜'인 사야가(김충선)가 조선군에 투항한 시기는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던 전쟁 초반이었다. 일본군 내부에는 풍신수길에 반감을 가진 장수나 병사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며, 이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무섭게 조선군에 투항했다. 헌데 이 만화에선 이런 '사실'을 철저하게 왜곡한다.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으니 나머지야 오죽할까.
뭐, 좋다. 역사야 부차적인 문제라고 치자. 추리물, 특히 스릴러라 하면 기본 뼈대를 확실하게 세워놓고 중간중간에 완급 조절을 적절히 하면서 긴장감을 높여나가야 한다. 헌데 이 만화는 기본 뼈대가 엉성한데다 완급 조절에도 실패했으며 긴장감이라곤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런 주제에 이야기는 가지치듯 퍼져나가고 새로운 인물이 계속해서 등장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막판에 가선 부풀려질대로 부풀려진 이야기가 풍선 터지듯이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니, 엄청난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이 혼란통에 권가야도 한몫 단단히 한다. '그림'은 잘 그리지만 '만화'는 못 그리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백성민 화백과 고우영 화백을 비교해 보면 '그림' 잘 그리는 만화가와 '만화' 잘 그리는 만화가 사이의 차이점을 금방 알 수 있다. 백성민 화백의 [상자하자]는 그림 하나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허나 만화의 전체적인 재미를 놓고 보면 고우영 화백의 [수레바퀴]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과 연출과 구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권가야의 그림엔 뭇 만화가를 압도하는 힘이 있지만, 구성력과 연출력은 평균 이하의 수준에서 맴돈다.
문제는 [푸른길]에서 그의 장점보다 약점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엉성한 연출과 구성으로 일관하니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이래서야 그림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단 한마디, '구제불능' 이란 말로 요약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한국 만화가와 일본 스토리 작가의 의욕적인 합작은 의도적인 종이 낭비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런 만화를 위해 아마존 산림이 희생되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젠장맞을!
2004/06/15 02:36 2004/06/15 02:36

아이디의 의미?

잡담 | 2004/06/11 16:16 | djhan
아이디의 의미가 뭔지 묻는 트랙백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또한 쓸데없는 발상이다.

사흘 밤낮 고민 때리다가 졸음을 견디지 못해 비몽사몽 꿈나라 문턱을 넘나들던 와중에 난데없는 천둥벼락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하늘에서 거룩한 목소리로 계시를 내리시어 그에 따라 아이디를 지었노라 말한다면 이 얼마나 장쾌하고 멋들어진 이야기겠는가.
하지만 자기 아이디 만드는데 사흘 밤낮은 고사하고 5분 이상 고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궁금할 따름이다. 나? 나 역시 5분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따위에 고민할 시간 있으면 술이나 먹겠다.

91년도 하이텔에 가입하면서 최초로 만든 아이디는 DJtoU였다. 처음엔 당시의 유행을 따라 DJ2U나 DJ4U로 할까 했는데, 영자와 숫자가 섞이면 아무래도 타이핑하기 귀찮다. 그래서 DJforU와 DJtoU 중에서 글자 수가 적은 DJtoU를 선택했다. 믿거나, 말거나.
천리안 및 맥 커뮤니티에선 fuckpc란 아이디를 사용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맥유저의 끈기와 인내를 천하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

한글 아이디 시대에는 '파란만장'이란 아이디를, 인터넷이 범람하면서부터는 djhan이란 아이디를 애용했다. 치기도 쉽고 쓰기도 쉽고 두루두루 좋은 아이디 아닌가. 누군가 djhan 아이디를 선점한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fuckpc와 ekkamuth와 shakamuth란 아이디를 사용했다. 에카무드와 샤카무트의 의미를 묻는 자, 진정한 나의 정체를 모르는 자일지어다.

아이디는 다른 사람과 나를 차별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여받은 성씨나 이름과는 달리, 자기 자신이 자유롭게 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호'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남들이 보기 좋고 자신이 쓰기 좋다면 그만이다. 아이디의 의미야 자기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고 쓰기도 어려운데다, 그 유래와 의미를 구질구질하게 설명해야 하는 아이디는 결코 좋은 아이디가 아니다.
2004/06/11 16:16 2004/06/11 16:16

역도산이 왔다

도서비평 | 2004/06/10 17:31 | djhan
산지도 한참이고 읽은지도 꽤 되었으니 때늦은 리뷰가 되겠다. 제목에서 쉽사리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한국계 일본인 프로레슬러 '역도산(리키도장)'의 일대기를 다룬 논픽션이다. 저자는 현역 프로레슬러이자, 일본의 남녀 혼성 어덜트(!) 프로레슬링 단체인 옵테인 퓨처의 한국 지사장을 겸하고 있는 김남훈 씨.
단순한 평전으로 그쳐서는 장사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역도산의 출생지라 할 수 있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 즉 북한 - 의 [역도산] 만화가 첨부되어 있다. 만화가는 김태권 씨, 북한 사람이니만큼 자세한 이력은 불명으로 남아 있다.

불행히도 북한판 [역도산] 만화의 완성도는 엉망진창이나 다름없다. 역도산을 '왜놈과 양키들에게 맞서 싸운 조선인 애국자'로 미화한 정도야 애교로 봐 줄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고우영 화백도 한때 오오야마 마쓰따쯔(최영의)를 '왜놈과 양키들에게 맞서 싸운 태권도 고수'로 묘사한 [대야망]을 그리지 않았던가(최영의에 대해선 언젠가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터인즉, 여기선 생략하겠다).
하지만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다룬 만화답지 않게, 레슬링 장면은 가히 가관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넉 사자 굳히기 Figure four leg lock'는 상대편의 다리를 4자 모양으로 비틀고 조여서 고통을 주는 기술이건만, 여기선 상대편의 몸에 4자 모양으로 달라붙는 기술로 그려지고 있다. 이쯤 되면 기술을 당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괴롭다.

하지만 김남훈 씨의 글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씌어졌다. 승리를 위해 지독한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의 성공을 위해 조선인이란 사실을 철저히 감추었던 역도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제자들에게 급료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혹독하게 다그치고, 한밤중에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돈 세는 재미로 살았던, 치사하고 더러운 모습을 낱낱이 공개한다.
그리고 지은이는 프로레슬러답게 역도산의 경기를 진지한 태도로 반추한다. 기술과 기술, 힘과 힘이 부딪히는 레슬링 장면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하니 역도산이 싸우는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떠오른다.

(역도산의 경기 대부분은 오늘날의 WWE와 마찬가지로 미리 정해진 각본대로 운용되는 '쇼'였다. 그러나 프로레슬링 팬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프로레슬링은 단순한 '쇼'가 아니라 목숨을 건 '격투 쇼'다.
프로레슬링 자체는 위험하기 그지 없는 고난도의 격투 기술이다. 제아무리 쇼라 한들, 레슬러들이 시합 도중에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하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이것은 역도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역도산의 레슬링 경력을 중심으로 서술하는데 급급하여 다른 부분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니, '평전'이라고 부르기엔 약간의 부족함이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역도산에 관심있는 프로레슬링 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참고 링크 : 믹 박사의 소화 프로레스 연구실(일본어) - 소화불량(?) 시대의 일본 프로레슬링 자료를 모아놓은 일본어 사이트. 50~80년대 초엽의 레슬러 프로필, 경기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2004/06/10 17:31 2004/06/10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