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잔인해진 게 아닐까?"
무거운 목소리, 무천이었다.
남쪽 창문을 가린 블라인드 틈새로 가느다란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바닥에는 연한 갈색의 마루가 깔렸다. 쓸데없는 장식이나 가구는 찾아볼 수 없는, 크고 넓은 도장(道場)이었다.
도장 한가운데 석상처럼 앉아 있는 사람은 무천, 그를 마주보듯이 한쪽 벽을 등지고 단정하게 정좌한 사람은 증산도주 현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무천 형님께서도, 검룡 형님이 당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어릴 적, 현진은 검룡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과 형제자매처럼 어울려 지냈다. 무천은 제일 큰형님이었고, 둘째가 검룡이었고, 그 다음이 현진이었고, 넷째는 인랑, 막내는 월영이었다. 그들은 비록 공석에서는 아래위를 엄격히 구분했지만, 사석에서는 서로를 형님이니 아우니 하는 호칭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성을 상실하고 잔인한 행동에 심취하면 스스로를 해치고 적을 이롭게 할 뿐이다."
"지나친 걱정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무천은 머리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현진의 옆에 놓여져 있던 소형 영사기에서 한 줄기 빛이 솟아오르며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도주님께 아뢸 일이 있습니다."
밭고랑처럼 보이는 주름살이 여기저기 깊이 아로새겨진 홀쭉한 얼굴, 코밑에서 턱밑까지 무성하게 자란 흰 수염, 그러나 가늘게 찢어진 두 눈에선 지혜로운 빛이 번득이는 늙은이. 그는 증산도의 책사(策士), 영지(領智)였다.
"무슨 일입니까?"
"기독교도들이 과천 일대의 교구와 포교권을 걸고 싸움을 청해 왔습니다. 놈들의 장수는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그렌 톰프슨, 그리고 성령교회의 정지우라고 합니다."
"군세는 어느 정도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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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를 포함해서 총원이 스물 둘. 그 중의 절반은 미국인일 겁니다."
"마침 잘 됐군요. 우군장 검룡이 사업차 과천에 내려가 있습니다. 이번 일은 검룡에게 맡기면 되겠군요."
"예, 저도 도주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지는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만사 불여튼튼이죠. 일단 우군장의 친구인 천도교의 좌장군 백호에게 응원을 부탁해 뒀습니다."
"과연 책사께선 빈틈이 없으시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영지가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은 눈부신 빛으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무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물 둘이라. 많다면 많은 숫자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현진이 단언하듯이 말했다. "검룡 형님에 비하면, 놈들은 썩은 짚단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과천 교외에는 대성 전자의 반도체 공장이 있었다. 기술력과 규모, 양쪽 모두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공장이었다. 최근에는 그 규모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서 주변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입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건설 예정 지역의 거의 대부분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실상 언제라도 확장 공사에 착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철 지난 전쟁영화에 나오는 독일군 작전회의실처럼 냉정하고 계산적이고 실리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방, 그곳은 대기업 회의실이었다. 삼면이 차가운 콘크리트로 밀폐되었고, 공기는 싸늘했고, 창 밖의 하늘엔 을씨년스런 먹구름이 끼었다. 체리 빛깔의 길다란 탁자를 끼고, 창을 등진 자리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과천시청에선 이런저런 핑계를 내세우며 허가를 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환경부에서 갑자기 환경영향 평가를 다시 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신규사업부의 이중호 과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표정은 과히 밝지 못했다. 옆자리의 곽진수 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조시장이 손을 쓴 거더군요." 곽부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을 마주보고 앉은 사람은 둘, 하나는 대성전자의 정성우 사장, 다른 하나는 대성그룹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대성무역 감사실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었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과천시장이라는 건가?"
정성우 사장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회사를 이끄는 사장의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었다. 강한 자제력과 인내심을 가진 사내, 그 때문에 그는 철인(鐵人)으로 불렸다. 하지만 나이가 쉰 줄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는 그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지난번 환경영향 평가가 잘못됐으니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것은 문대식 환경정책실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문실장은 조시장의 대학 동창이자 후원회 부회장이기도 하죠." 이과장의 말이었다.
"그리고 몇 달 전부터, 두 사람이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다더군요. 고급 술집에서 만나 수백만 원씩 퍼 마시기를 예사로 했답니다. 돈은 물론 조시장이 지불하고요." 곽부장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요컨대 조시장하고 환경부 문실장이 짝짜꿍이 맞아서 일을 이렇게 꼬이게 만들었단 말이군. 좋아, 그렇다면 녀석들이 원하는 건 이건가?"
정사장은 오른손 검지와 엄지를 맞잡아 동그라미를 그렸다. 곽부장과 이과장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시장은 재작년의 선거 운동에서 너무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사실상 파산한 거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번 확장 공사에 트집을 잡아 돈을 뜯어낼 작정인가 봅니다."
이과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았고, 곽부장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흘 전에 문실장과 연이 닿는 사람을 통해서 슬그머니 물어 봤더니, 조명우 시장 후원회에 상당한 기부금을 낼 각오를 하라는군요. 정확하게 얼마를 원하는 지 알아내기 위해서 부랴부랴 접대 약속을 잡아야 했죠. 마침 문실장이 내일 저녁에 후원회 일로 과천에 내려온다기에, 그때 조시장과 함께 만나기로 했습니다."
"상당히 거한 접대가 되겠군요."
가시 돋친 말투, 그것은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성무역의 김세훈 과장이 내뱉은 대사였다.
"아, 예,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조시장이 애용하는 시내 일급 요정을 미리 예약해 뒀습니다. 먹고 마시는 건 뭐든 최고급으로 즐기는 사람이라서, 접대비만 해도 만만치 않게 들 겁니다."
곽부장은 말을 마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김과장을 바라봤다. 몸에는 검은 양복을 걸치고, 얼굴에선 날카로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 약간의 새치가 섞인 검은 머리를 뒷덜미에서 묶어서 늘어뜨린, 이십 대 중반의 젊은이, 마흔 줄에 접어든 중간 관리자가 보기엔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시건방진 애송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탐탁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사에서 파견된 감사인의 비위를 건드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후원금 문제는 본사 차원에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김과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내일 접대 건은 여러분들께서 잘 처리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자, 그럼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서 일이나 보게."
정사장은 손을 흔들며 곽부장과 이과장에게 빨리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목례를 하고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등 뒤에서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넓은 복도로 나와,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사장과의 대화가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한편, 정체불명의 감사인에게 야유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대체 그 젊은 놈은 뭐야? 머리모양이며, 행동거지며, 말하는 싸가지며, 도대체 어떻게 저 따위 녀석이 과장 직함을 달고 있는지 모르겠군."
곽부장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김과장이 맞장구를 쳤다.
"글쎄 말입니다. 분명히 낙하산일 겁니다. 낙하산. 어딜 가나 저런 놈들이 꼭 있다니까요."
"자네 말이 맞아. 젠장, 분명히 빽을 써서 들어온 낙하산일 거야. 할 줄 아는 일은 아마 연필 깎는 일 정도겠지."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젊은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며 낄낄거렸다. 하지만 점점 멀어져 가는 회의실의 두터운 마호가니 문 안쪽에서, 김세훈 과장은 그들의 대화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저 사람들 보기엔 제가 별 볼일 없는 낙하산으로 보이는 모양이군요."
김세훈의 말에, 거지반 식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정사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하니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휘둘리는 건 아니겠지?"
"저도 낮에는 평범한 월급쟁이입니다. 세간의 평가라는 것에 조금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요."
"자네가 스스로를 월급쟁이로 여기고 있다니 놀래 자빠질 노릇이구먼." 그는 차 한 모금을 마신 뒤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정치가와 공무원이란 족속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전혀 달라지질 않는군. 정말 짜증나는 놈들이야."
"그렇습니다. 그런 부패분자들이 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 거죠. 전대 도주님께선 그런 자들을 가리켜 밥벌레라고 하셨죠. 그러니 내일 밤의 연회는 가급적 호화판으로 베풀어 주는 편이 좋겠죠. 베짱이도 길어야 한철일 뿐이니까요."
김세훈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정사장의 등줄기에 오한이 서릴 정도로 섬뜩한, 그런 미소였다.
"자네가 양복을 입은 꼴을 보니 배꼽을 잡고 웃어주고 싶어지는군."
"나야말로 자네가 체육복을 입은 꼴을 보니 기가 막혀서 기절하고 싶어지는데?"
김세훈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리자, 먼저 말을 꺼냈던 덩치 큰 청년이 껄껄대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너무 하는군. 대(大) 대성그룹 과장 나리께선 체육대학 강사는 눈에도 차지 않는 모양이시네그려?"
김세훈이 묵고 있던 비즈니스 호텔의 거실, 안락한 소파 위에 앉아 있던 청년은 용인대 체육교육학과의 시간강사 장준석이었다.
"여자도 아닌 남자가 눈에 찰 리가 없지. 그나저나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 두자고. 자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역시 그것 때문이겠지?"
그러자 장준석은 소파 옆에 세워 둔 길쭉한 가죽 륙색을 소시지처럼 두꺼운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맞아, 연장도 잊지 않고 가져왔지."
"또 영지 어르신이 끼어든 건가?"
"투덜댈 것 없어. 자네가 벌이는 바보짓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여기저기 널리고 널렸으니까 말이지."
김세훈은 냉장고를 열고 병 맥주를 꺼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하간 늙은이들이 걱정은 많아 가지고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장준석은 김세훈이 건네준 병 맥주 뚜껑을 이빨로 뜯어냈다. 그리고 단숨에 절반 가량을 들이키더니 시원하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김세훈은 병따개로 뚜껑을 따면서 고개를 슬쩍 창가로 돌렸다.
"좀 있으면 해가 지겠군."
"그래, 일몰까지 앞으로 기껏해야 삼십 분 정도?"
짙은 노을이 깔린 하늘은 핏빛. 그것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은 멀리서 밀려오는 어둠처럼 광택 없는 검은빛.
김세훈은 맥주병을 입에 물고 천천히 기울였다. 씁쓸한 음료가 목에서 가슴까지 시원하게 적시는 느낌, 그 상쾌한 느낌을 만끽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가 진 뒤에는 놈들의 피를 보러 나가야겠지."
"그렌 톰프슨을 필두로 하는 열 여섯의 기사단(騎士團)이 이미 고려 성령교회의 사람들과 합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버그 목사가 그렇게 말하자, 맥퍼슨 대장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미(全美) 펜싱 챔피언인 '말벌' 톰프슨을 보냈단 말씀이오?"
"사자를 잡을 때는 최고의 총을 써야 하는 법이오. 게다가 놈은 보통 사자가 아니지 않소?"
"그야 그렇소. 무수한 기독교 전사를 잡아먹은 악룡(惡龍)을 사자라고 할 수야 없는 일이지요."
더글라스 대주교의 지적에 동감한다는 듯이 맥퍼슨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대적하기 버거운 상대지요."
"설마하니 톰프슨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의 내공과 검술은 이미 범인의 경지를 초월한 지 오래요. 지난번 전쟁 당시,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팔라딘이 되고도 남았을 거요."
"저는 톰프슨의 능력을 얕보거나 의심하진 않습니다." 더글라스 대주교가 말했다. "다만, 검룡의 칼 앞에서 너무나 많은 팔라딘이 무력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라고 해서 그 일을 잊은 건 아니오." 버그 목사는 퉁명스레 말했다. "이번에 출정하는 기사단원들은 톰프슨 자신이 직접 가려 뽑은 일당백의 검사(劍士)들이외다. 또한 성령교회에선 최고의 무사들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소."
"버그 목사, 고려인들의 약속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되오."
더글라스 대주교가 빈정거리자, 버그 목사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 순간, 교황이 두 손으로 원탁을 내리치며 역정을 냈다.
"모두 그만들 두지 못하겠소? 지금은 입씨름을 할 때가 아니오!"
원탁을 둘러싼 다섯 명의 홀로그램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교황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숙이고 경건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하늘에 계신 주님께 승리를 기원하는 것뿐이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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