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마녀전

도서비평 | 2004/06/15 23:49 | djhan
"그대가 백발이 되었다면 나는 영단묘약을 구해 그대의 청춘을 되찾아 주겠소이다!"
- 탁일항, 양우생의 [백발마녀전] 중에서


80년대 한국 무협 작가는 크게 양우생 추종파와 고룡 추종파로 나뉜다는 주장이 있다. 강호의 고수들이 기기묘묘한 무협 초식으로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집착한다면 그것은 양우생을 추종하는 작가요, 음모론과 더불어 '그것은 바로 ***이다!'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남용한다면 고룡을 추종하는 작가라는 주장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주 옳은 말도 아니다. 양우생은 중국의 고전에 밝아 작품 곳곳에 품격있는 한시(漢詩)를 쓸 줄도 알았으며, 서양 소설의 얼개를 도입하는 등, 무협지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크게 공헌한 실렸있는 작가였다.
그리고 고룡은 추리소설의 요소를 끌어들이고 사나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동시대의 독자들을 매혹시킨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 중화권에서는 특히 인기가 높아 [초류향], [육소봉전기] 등은 꾸준히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무협지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80년대, 김용은 장대한 스케일로 독자를 사로잡았고 고룡은 특유의 문장력과 복잡한 음모론으로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양우생 역시 많이 읽히긴 했지만, 앞의 두 작가에 비해 무게감은 약간 처지는 편이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백발마녀전]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은 흐릿할 뿐이었다.

헌데 얼마 전,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를 읽던 도중 간만에 머리 끝까지 짜증이 솟구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고 기분전환도 할 겸, 속 시원한 읽을거리를 찾는데 때마침 손에 잡힌 것이 양우생의 [백발마녀전]이었다.
사흘동안 출퇴근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며 기억을 되살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름다운 고전의 향취를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 또한 시대를 뛰어넘지 못한 고전의 비애를 느꼈다고나 할까.

양우생의 전성기는 50년대이며 [백발마녀전]은 한참 물이 올랐을 시절의 대표작이다. 50년대의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탁일항과 옥나찰의 이뤄질 듯 이뤄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가 신선하게 여겨졌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양우생의 작품이 번역 출간된 80년대에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전락해 버렸다.
상세한 역사적인 지식과 중국 시가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유감없이 자랑하건만, 일관성있는 구성력에선 김용보다 한수 아래다. 역사적인 사건과 아름다운 노래가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묻힌 김용의 작품과는 달리, 양우생의 작품에선 서로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 절로 위화감이 싹튼다. 스테레오 타잎의 등장인물들이 갈팡질팡 좌충우돌을 거듭하니, 이야기에 몰입하기 어려워 절로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닌 고전으로써의 매력은 뭇 단점을 모두 덮고도 남음이 있다. 고리타분한 초식의 나열로 묘사되는 싸움 장면은 일견 지루하지만 다시 보면 새롭기마저 하다. 명나라 말기의 역사적 사건들에 영웅 호걸들이 얽혀들며 새로운 이야기가 가지쳐 나간다. 곳곳에 삽입된 유려한 시가(詩歌)는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대도 옥나찰과 명문정파의 후계자 탁일항의 이뤄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는, 구태의연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는이의 심금을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 탁일항이 자신의 제자에게 '장차 내가 죽게 된다 해도 너는 이 두 송이의 선화를 지켜야만 한다'라고 처연하게 이르는 부분에선 솟구치는 감동을 주체하기 어렵다.

[백발마녀전]은 김용의 작품처럼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과 세대를 뛰어넘는 매력을 갖추진 못했다. 허나 무협의 역사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한 신파(新派)의 비조 양우생의 대표작답게, 결코 가벼이 무시할 수 없는 고전의 향취가 담뿍 배인 작품이다. 진심으로 무협지를 사랑하는 사나이라면 낡고 구태의연하고 지루하다는 단점마저도 고전의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추가 : 예전엔 [백발마녀전] 영화를 쓰레기라고 생각했지만 소설을 재독한 다음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만큼 방대한 원작을 1시간 반에서 2시간 분량으로 그럴싸하게 압축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은 평가해 줘야 하지 않을까.
2004/06/15 23:49 2004/06/15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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