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히군, 구릉 위에 바짝 달라붙듯이 몸을 낮추고 그동안의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경하던 현지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권위마저 남김없이 상실하고 상가집 개처럼 어깨를 늘어트린 서종화가 살아남은 무리를 다그쳐서 시신을 수습해 거칠고 황량한 길을 벗어나 비척비척 물러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거 봐요. 저 사람은 살아나고도 남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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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진랑랑은 어느샌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피비린내나는 싸움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현지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녀를 껴안고 말에 올라탔다.
"저런 건 어린애가 볼만한 것이 아니다."
현지위가 타이르자 진랑랑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이미 볼 건 다 봤어요."
자갈이 굴러다니고 모래가 가라앉은 황톳빛 길엔 싯뻘건 피가 붉은 양탄자처럼 깔리고 죽은 말의 시체가 적갈색의 동상처럼 누워 있었다. 무채색에 더해진 강렬한 유채색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불길한 예술이었지만, 장손혁은 자신이 이룬 예술에 감동하지도 않았고 씁쓸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칼을 칼집에 되돌려 넣고 무표정하게 길 저편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장손대협."
현지위가 옆에 붙어서 말을 거니 장손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기껏 가져온 말 세 마리에 자네 조랑말까지 잃어버렸으니 대단한 손해를 본 셈이야."
순간적으로 '당신은 돈 생각밖에 못 하는 거요?'라는 호통이 현지위의 목젖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겨우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말을 잃어버린 것은 작은 일에 불과하니 괘념치 마십시오. 제가 대단하다고 한 것은,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저 자들을 쫓아낸 대협의 무용(武勇)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까짓 게 대단할 건 뭔가."
장손혁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겸손함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한나절을 넘게 개미를 눌러죽여 놓는 일에 몰두했지만 거기서 어떠한 종류의 자부심도 얻지 못한 어린애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때, 진랑랑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죠. 제갈노의 사정 거리는 보통 스무 발, 길어야 서른 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싸움에는 쓰지 못하고 좀도둑을 막는 것조차 버겁다는 조롱을 듣죠. 그 제갈노와 말 세 필을 가지고 스무 명 가까운 적당(敵黨)을 물리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과연 천지이 백하응의 손녀답게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깊군, 현지위는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장손혁은 피식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어설프게 아는 척 하지 마라, 꼬마야."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제갈노의 시위를 가볍게 튕겼다. 퉁, 무겁고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
"네 말대로 제갈노는 화살이 닿는 거리가 짧아서 무림인은 물론이고 도적들에게조차 비웃음을 사는 무기다. 하지만 이건 아주 특별한 놈이지. 몽고에 잡혀간 고려의 장인이 만든 물건이거든. 활몸은 대나무와 뽕나무로 만들고 거기에 물소뿔을 덧대어 탄력이 보통 활의 갑절을 넘고, 쇠심줄을 여러번 꼬아 만든 활시위는 어지간해선 끊어지지도 않지. 보통 제갈노라면 여자들도 쏠 수 있겠지만 이건 어지간한 팔심으로는 고현기를 내릴 수조차 없어."
그러면서 장손혁은 별로 힘들지도 않다는 듯이 고현기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했다. 그때마다 퉁, 퉁, 활시위 퉁기는 소리가 북처럼 울렸다.
"이놈의 사정 거리는 쉰 발짝이 넘고 서른 발짝 안에선 치명상을 입힐 수 있지. 떼거리로 몰려 다니는 겁쟁이 녀석들의 엉덩이를 후려갈기기엔 딱 좋은 무기야." 그는 보따리에 제갈노를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손에 넣으려고 고려인 장인에게 몽고말 두 마리를 갖다 바쳐야 했지만, 그 값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야."
"어쨌든 대협 덕분에 당분간은 길이 편해지겠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현지위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하며 장손혁은 다시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많이 허비했어. 서둘러 길을 가도록 하세. 여기서 이틀은 더 가야 관도(官道)가 나올 테니까."
그들은 말 배에 박차를 가했다. 우렁찬 말울음 소리와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구불텅한 길을 따라 구비구비 길게 흘러가면서 짙은 모래먼지를 남겼다.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