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놈을 풀어주자고 했을 때 내가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소? 정말 꼴 좋게 됐군!"
버그 목사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길길이 날뛰었다. 알렉세이 3세는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그때 공연한 자비심을 베풀지 않고, 후환을 없앨 걸 그랬습니다."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더글라스 대주교가 침착하게 말했다. "게다가 당시의 휴전 조약에는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동의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알렉세이 3세는 멋쩍은 듯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버그 목사는 여전히 불퉁스런 얼굴이었다.
"난 마지못해 동의했을 뿐이란 사실을 기억해 줬으면 고맙겠구려."
"버그 목사, 이제 그쯤 해 두시죠. 지금 중요한 건 지난 일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아니오."
파울로스 7세가 일침을 놓자, 맥퍼슨 대장로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난 일은 물에 흘려 보내고 잊어 버립시다. 지금은 머리를 맞대고 승리를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할 때요."
"그렇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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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탁자 밑에 장치된 키보드를 두들겼다. 원탁 중앙에서 여러 줄기의 빛이 빗살처럼 뿜어져 나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돌더니 하나의 둥그런 형체를 그렸다. 그것은 지구본이었다.
"지금, 우리 기독교는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계 각지에서 구교(舊敎)와 신교(新敎)를 가리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신자 수가 줄어들어 교세가 크게 위축되는 형편입니다."
천천히 회전하는 지구본, 거기에 그려진 지도는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럽과 남미 대륙, 그리고 북중미는 보라색이었다. 아프리카는 거의 대부분이 붉은색이었다. 아시아는 녹색과 주황색, 푸른색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한반도와 일본, 만주 일대에는 드문드문 보라색이 섞여 있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고려는 우리가 아시아 전도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곳이요. 한때는 남한 인구의 삼 분지 일 이상이 기독교를 신봉하기도 했소이다. 헌데 이제는 그렇지 않소. 잘 쳐 봐야 십 분지 일이 될 정도로, 철저하게 몰락해 버렸소."
그러자 버그 목사가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우리 선배들이 고려를 남과 북으로 쪼개고 속세의 전쟁을 일으킨 건 정말 훌륭한 판단이었소. 그로써 빨갱이를 모조리 북으로 쫓아내고, 남쪽에 남아 있던 불신자들을 종교 전쟁으로 쓸어버려서 견고한 믿음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남과 북이 통일된 뒤엔 모든 것이 달라졌죠." 더글라스 대주교가 말했다. "놈들은 속세의 전쟁에선 일본을 침공해 천만 명이 넘는 사람을 학살하고, 중국의 혼란을 틈타 간도까지 꿀떡 삼켜 버렸소. 그리고, 밑바닥에서 숨 죽이고 있던 놈들의 믿음이 다시 고개를 치켜 들면서 종교 전쟁이 일어났고……"
"12년 전, 그 전쟁의 결과는 우리의 참패였소." 교황이 말했다.
"남한 일부 지역의 교구를 빼앗기고, 간도와 북조선 일대의 포교권(布敎權)을 상실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죠." 파울로스 7세의 말이었다.
"3년 전에도 그런 참패가 재현될 뻔했습니다." 교황의 지적이었다. "하지만 검룡을 사로잡은 덕분에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휴전을 성사시킬 수 있었죠."
"놈들에겐 대단히 치욕적인 일이었겠죠." 더글라스 대주교는 단언하듯이 말했다. "아마 그때의 치욕을 갚기 위해서, 놈들은 이전보다 훨씬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나올 거요."
"특히 그 검룡이라면…… 녀석은 아마 이빨로 우리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을 거요." 맥퍼슨 대장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공포, 사람들의 얼굴에 번져 나가는 것은 공포, 그리고, 침묵, 그것은 공포에서 비롯된 침묵.
"약한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버그 목사가 버럭 화를 내며 목청을 높였다. "놈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좋소, 그렇게 해 줍시다. 놈들이 살육을 원한다면, 좋소, 그렇게 해 줍시다. 그리고 그 불신자의 무리에게 주님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 줍시다!"
"그렇소. 버그 목사의 말이 옳소." 교황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소. 우리는 단호하게, 가차 없이, 놈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목자로서 행해야 될 일이니,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입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 같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멘!"
"검의 기세는 백호가 낫지만, 기교는 검룡 형님이 여전히 한 수 위군요. 다행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검기(劍技)가 예전만 못하면 어쩌나 했습니다."
챙, 쇳소리에 섞여 드는 감탄조의 목소리, 이십 대 초반의 사내다.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팔다리는 길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깎았는데, 눈매는 다른 사람보다 곱절은 날카로웠다. 검은 도복을 입고 무늬 없이 새까만 흉갑과 견갑, 비갑을 찼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한 자루 장창(長槍)을 들었다.
"눈으로 보면 그렇겠지."
챙챙, 쇳소리 뒤에 끼어드는 묵직한 목소리. 태산처럼 듬직한 체격을 지닌 40대 초반의 중년 남자, 그는 팔짱을 끼고 두 눈을 내리깐 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소리를 들어 보면 서로간에 살기(殺氣)가 한 푼도 섞이지 않은 현란한 기술을 주고받을 뿐이구나. 저런 걸로 진정한 칼 솜씨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목숨을 건 겨루기(比武)와는 달리 칼춤은 그저 한바탕 화려한 춤에 불과하단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해라, 인랑."
인랑, 증산도의 좌군장(左軍將), 인랑(忍郞)은 씁쓸하게 웃었다.
"무천 형님의 말씀이 옳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눈을 감은 남자는 증산도의 전군장(前軍將), 무천(无天)이었다.
무천은 정정당당한 싸움을 고집하며 적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너그러운 무사였다. 하지만 12년 전, 그와 맞붙어 싸우다가 패배한 기독교의 기사가 목숨을 구걸하는 척 하면서 칼자루에 장치된 독연(毒煙)을 뿌리는 순간, 짙은 안개처럼 퍼지는 연기 속에서 눈동자가 새하얗게 타 들어가며 눈알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하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했다. 그 비열한 기사는 무천의 일수(一手)에 아흔 조각인가 백 조각으로 찢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천은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천은 여전히 최고이자 최강의 무사였다.
그는 칼이나 창을 들지 않은 맨손이었다. 몸 전체가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갑옷을 걸치지 않고 수수한 도복만 입었다. 누구도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칼춤에 불과할지라도 검룡 형님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절로 흥분이 됩니다."
"그런가요? 제 가슴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챙챙챙, 연이은 쇳소리 다음에 이어진 것은 앳된 소녀의 목소리.
"월영(月影),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무천이 물었다.
갓 스물이 됐음직한 가녀린 몸매의 소녀다. 새까만 저고리에 허리가 잘록한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화를 신었다. 가느다란 목을 보호하는 경갑(脛甲)과 양 가슴을 보호하는 넓은 흉갑 위로 하늘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오른손에 든 것은 한 자루 월도(月刀), 맑은 눈에 비친 것은 검룡의 얼굴.
"검룡 오라버니의 눈에는 이전보다 더한 증오심이 담겨 있습니다."
후군장(後軍將), 월영의 고운 얼굴엔 두렵고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고,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검룡 형님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광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놈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어요." 아름다운 소녀는 우울하게 속삭인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불안합니다."
챙챙챙챙, 마지막 쇳소리에 기묘한 둔탁함이 섞였다. 그것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부러지는 소리였다. 환도, 환도의 부러진 칼날이 눈부신 광채를 뿌리며 허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마지막 쇳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지며 불똥을 튀겼다.
백호는 칼을 크게 휘두르던 도중에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다. 검룡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손에 남아 있는, 중간 즈음에서 사선을 그리며 부러진 환도의 잔해를 바라봤다. 무천과 인랑, 월영을 비롯한 많은 무사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출정식의 검무에서 칼이 부러지는 것은 대단히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이다.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단 위로 쏠렸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증산도주였다.
"싸움에 나가기도 전에 칼이 부러졌는데 잘 된 일이라니요?" 대종교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싸움에 나가기 전에 부러졌으니 잘 된 일이지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싸움터에서 칼이 부러졌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그러더니 검룡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미 강노인에게 좋은 칼을 만들라고 일러 뒀습니다. 우군장은 내일이라도 당장 강노인을 찾아가 새 칼을 받아 오십시오."
"아니, 그렇다면 도주는 검룡의 칼이 부러질 걸 미리 예지하기라도 했단 말이오?"
천도교주의 물음에, 증산도주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예지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우군장의 칼이 너무 낡아서 위험하다 여기고, 미리 준비를 해 뒀을 뿐입니다."
검룡은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도주님께서 높은 도력(道力)을 베푸시고 넓은 혜안으로 살펴 주시니 미천한 아랫것은 그저 감복할 뿐입니다!"
불길한 징조를 순식간에 좋은 징조로 탈바꿈시키는 증산도주의 능력에, 사방에서 감탄의 함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전대(前代) 도주님께서 이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구나!" 무천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아버님께선 오라버님이 교단을 훌륭히 이끌 거란 사실을 이미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월영, 증산도주 김명휘의 하나뿐인 여동생, 이명지의 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때, 증산도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쟁을 앞두고 하늘에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빠트릴 수야 없겠죠."
"그런데 도주께선 어째서 제사 준비를 하지 않은 겁니까?" 대종교주가 물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물은 이제부터 준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품에서 한 권의 두루마리를 꺼내어 검룡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얇고 투명한 전자종이를 둘둘 만 것이었다.
"우군장 검룡은 들으시오. 사악하고 비열한 적도(敵徒)를 이 땅에서 쫓아내는 데 있어서 내부의 적을 다스리는 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적들과 내통하여 나라의 정치를 혼란케 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무리는 단호하게,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할 것이오."
"도주님의 말씀이 옳으신 줄로 아룁니다!" 검룡이 두루마리를 받아 들면서 외쳤다.
"왜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서양의 밀정 노릇을 하며 이 강산을 침탈할 궁리를 일삼던 선교사들의 유혹에 넘어가 근본도 모를 귀신을 떠받들고 강대국의 뒷구멍을 핥아대며 사리사욕을 채웠던 역적들, 아라사(俄羅斯:러시아)에 빌붙은 협잡꾼들, 중국에 백두산을 뜯어준 배신자들, 전쟁을 틈타 미국에 국방권을 팔아 넘기고, IMF 위기와 FTA 협상을 핑계로 경제마저 팔아 넘기려 획책한 모리배들, 그런 자들은 자손 5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척살하여 상제님께 산제물로 바치도록 하시오!"
무시무시한 척살령,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 함성을 질렀지만, 단 위에 앉아 있던 청허 선사의 얼굴은 숫제 잿빛으로 변했다.
"증산도주,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어찌 아비가 지은 죄를 자식에게까지 묻는단 말이오이까?"
"선사님, 지난 세월, 우리가 매국매족(賣國賣族)의 무리와 배신자들, 그리고 기독교도들에게 쉴 새 없이 두들겨 맞은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인간의 도리를 따져가며 머뭇거릴 때, 놈들은 단호하게 행동에 나서 살육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젠, 우리가 그렇게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맞는 말이오. 도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어째서 도리를 따져야 하는 거요? 그럴 필요는 절대 없소이다! "
"더군다나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의 자손들에게 조상의 죄를 묻는 것은 천 번 만 번 지당한 일이오!"
일본 제국주의, 소련 공산주의, 미 제국주의와 손잡은 매국노들에게 대대로 치가 떨리는 고통을 당했던 천도교와 대종교의 후계자들은 저마다 얼굴을 대추빛으로 물들이며 이빨을 갈았다. 그 기세에 눌린 청허 선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룡은 두루마리를 단숨에 펼쳤다. 하얀 전자종이 위에 깨알만한 크기의 검은 글자가 가득히 떠올랐다. 그것은 명단, 살생부의 명단. 검룡의 시선을 따라 빠르게 스크롤되는 명단의 숫자는 적어도 칠, 팔천을 헤아렸다. 그는 다시 두루마리를 말아 옆구리에 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증산도의 충직한 검(劍)일지이니 오직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뿐입니다. 도주님의 명을 받들어 이 자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여서 피로 바다를 만들고 몸뚱이로 물길을 메우고 목으로 산을 쌓아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바치겠나이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기대하며 광희(狂喜)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증산도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 높여 말했다.
"검룡, 그대의 단호하고 가차 없는 행동은 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모든 무사들의 모범이 될 것이오."
환호성, 증산도의 무사들과, 천도교와 대종교의 무사들과, 가사를 입은 승병들까지 한마음으로 외치는 환호성, 무자비한 학살을 반기는 환호성, 뜨거운 환호성 속에서 월영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지기만 했다.
"하지만 아버님께선 오라버님의 성격이 너무 극단적이란 점을 염려하셨죠……"
독백, 그것은 우울한 독백이었다.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