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검룡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 자루의 칼을 받아 들고 전쟁터로 나섰다. 기독교도를 베기 위해서, 기독교도를 죽이기 위해서!
제 1장. ENSIS DRACO (3)
"전쟁이라고요? 차라리 잘 된 일이군요."
빛, 넓은 창문은 검은색 슬라이드 커튼으로 빈틈없이 막혔지만, 높은 천정에 매달려 있던 화려한 샹들리에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환한 빛을 방 안에 내리깔았다. 벽에 걸린 성화에서, 피로 물든 가시나무 관을 쓴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그리스도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원탁을 둘러싼 사람들을, 홀로그램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방금 입을 연 사람은, 미국에 있는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수장(首長) 니콜라스 버그였다. 눈은 게슴츠레하고 볼과 턱에 붙은 두둑한 살집은 불독처럼 축 늘어졌다. 인자한 목사라기보다는 탐욕스런 비즈니스맨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버그 목사,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난 십 수 년 동안에 상황은 많이 나빠졌습니다."
그 옆에서 말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대장로(大長老) 죤 맥퍼슨이었다. 장로라는 호칭이 썩 잘 어울리는, 위엄과 품격을 두루 갖춘 늙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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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인 생각은 거두시오, 맥퍼슨 장로. 지난 번의 전쟁에서 우리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 승리할 수 있었소. 그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아주고, 잃어버린 교구를 탈환하고 포교의 권리를 되찾는 것이 참된 기독교도의 사명일 것이오."
"승리했다는 건 지나치게 과장된 평가군요. 실은 겨우 패배를 면했다고 말해야 정확하겠죠."
에티오피아 정교의 총대주교 아부나 파울로스 7세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나이는 쉰 다섯, 호리호리한 체격에 구릿빛 얼굴, 홀쭉한 뺨에서 뾰족한 턱까지 하얀 구레나룻 수염에 덮였고, 길게 찢어진 눈은 차갑게 식은 강철처럼 번쩍였다.
"그때 '팔라딘'들이 절묘한 시기에 적장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 목숨을 담보로 휴전 협상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겨우 패배를 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말에, 버그 목사는 불편한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 싸움 때문에 12인의 기사, 팔라딘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죠. 적장(敵將) 하나에게 다섯이나 되는 성기사(聖騎士)들이 목숨을 잃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호들갑스런 목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러시아 정교의 총대주교, 알렉세이 3세였다. 그는 엄숙하고 과묵해 뵈는 인상과는 달리 무척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소. 다행히 놈을 사로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최악의 실패로 기록될 뻔한 작전이었소."
세계 성공회 서열 1위, 앤드류 더글라스 대주교가 알렉세이 3세의 말을 거들었다. 깊은 눈, 높은 콧대, 딱딱하고 차가운, 전형적인 영국인이란 느낌을 주는, 40세 중반이란 이른 나이에 대주교로 선출된 능력 있는 사내.
"그 놈이 돌아왔소."
교황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원탁 주변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고 말한 겁니까? 아니, 놈이라니 어떤 놈이 돌아왔다는 거요?"
알렉세이 총대주교가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러자 교황이 양미간에 주름살을 잡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놈이 돌아왔소. 증산도의 우군장(右軍將), 검룡이 돌아왔단 말이오!"
"시호(時呼)!"
서울, 광범위하게 재개발되고 있는 종로, 낡은 건물은 사라지고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은 건물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낮에는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공사판의 소음으로 정신이 없지만,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간에는 사방이 한적하고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종로 한복판에 세워진 120층짜리 대성 그룹 본사 건물 주변도 적막함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지하 10층 주차장 아래 감춰져 있는 지하 11층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시호(時呼)!"
중앙 엘리베이터의 카드 리더기에 특수한 인증 카드를 삽입하거나, 지하 주차장의 벽면에 숨겨진 계단을 찾아야만 내려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지하 11층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넓이만도 천여 평이 넘는 대강당이 펼쳐져 있었다.
높다란 천장에 달린 수천 개의 불빛이 장내를 환하게 밝혔고, 바닥엔 단단한 화강암의 포석(鋪石)이 깔렸다. 남쪽 끝에는 야트막한 단이 세워졌는데, 양쪽 끝에는 청동 화로가 놓여졌고 그 사이로 네 사람이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단 아래에선 팔백여 명의 무사들이 그들을 경배하듯이 무릎을 꿇고 앉아, 단 하나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시호(時呼)!"
때가 부르고 있었다. 때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푸른 도복을 입은 무사, 검은 도복을 입은 무사, 하얀 도복을 입은 무사, 잿빛 도복을 입은 승려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호(時呼)!"
단 위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증산도주 현진, 그가 오른손을 들자 무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싸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두루마기 앞섶에 단 소형 마이크를 통해, 강당 곳곳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우리는 지난 수백여 년 동안 강대국에게 짓밟히고 휘둘리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속세의 전쟁으로 이 나라의 정권을 탈취하고, 종교 전쟁으로 우리들의 믿음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외국의 귀신을 숭배하고 외국에 충성하며 외국의 이득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넘쳐나게 됐습니다."
뒤이어 천도교주 감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주먹을 번쩍 들며 외쳤다.
"이제 그런 시대를 우리들의 손으로 끝낼 때가 온 것이다!"
함성, 무사들의 함성이 드넓은 강당을 빈틈없이 메웠다.
전진, 누군가가 그 함성을 뚫고 길을 헤치며 걸어왔다.
새까만 코트자락과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걷는 사나이, 검룡이었다.
"우군장께선 제시간에 맞춰 선전포고를 하고 오셨습니까?"
현진의 물음에, 검룡은 단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우군장 검룡, 도주님의 명을 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부러진 십자검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어 바쳤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십자검의 기사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전리품, 증산도주는 전리품인 십자검의 파편을 높이 들어올렸다.
환호성, 무사들의 환호성이 천장을 찌를 듯 했다.
"서울에 도사리고 있던 놈들의 기사를 쓰러트렸다니 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신 듯 하오." 천도교주의 말이었다.
"비록 살생을 범하긴 했으나, 서전(緖戰)의 승리로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장대한 몸에 잿빛 가사를 두른 50대의 승려가 묵직한 강철 선장(禪杖)을 짚고 일어나 그렇게 말했다. 불교의 대표, 청허 선사였다.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굴리고 염불을 외우며, 죽은 자의 명복을 빌었다.
"참으로 대단하오. 검룡과 같은 장수가 있는 것은 증산도주의 복이외다."
눈처럼 새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대종교의 교주, 경백(景柏) 유제현은 찬탄을 금하지 않았다. 나이 일흔이 넘어 외모는 볼품없이 쭈글쭈글했지만, 그의 두 눈에는 여전히 위엄이란 것이 살아 있었다.
"천도교에도 인물은 있습니다." 천도교주가 질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검룡과 동년배인 좌장군(左將軍) 백호(白虎)만 해도, 지난 수십 차례 싸움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습니다."
"천도교 좌장군의 명성은 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증산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나저나 출정식에서 검무(劍舞)가 빠져선 아니 될 것이오. 이번 검무는 백호와 검룡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소?"
천도교주의 제안에 증산도주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검룡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군장께서 다시 한 번 수고해 주셔야겠습니다."
"도주님의 명이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는 코트를 벗어 던지며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칼춤을 추겠다. 모두들 뒤로 물러나라!"
무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단 앞에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푸른빛 옷을 입은 무사들 중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오랜만이다, 검룡."
키가 190이 훨씬 넘는 거한이었다. 청옥색 전포(戰袍)를 입고, 쪽빛의 흉갑과 비갑(臂甲:팔 가리개), 굉갑(肱甲:정강이 가리개)을 찼다. 짧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은 보통 사람의 허벅지만큼이나 굵고, 넓은 등에는 한 자루 거대한 칼을 멨다. 머리는 짧게 깎고 넓은 이마엔 푸른 수건을 동여맸다. 굵은 눈썹,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커다란 입술.
"오랜만이다, 백호." 검룡이 환도를 뽑아 들며 말했다.
"자네하고 칼을 어울리는 건 3년만인 것 같군."
백호는 등에 멘 칼을 뽑아냈다. 그것은 인검(寅劍), 하지만 연철로 주조된 의장용의 삼인검이나 사인검과는 달리, 강철로 만들어진 순수한 의미의 살인검(殺人劍). 폭 15센티, 길이 160센티, 날이 바짝 선 넓고 무거운 검신이 서슬 퍼런 빛을 내뿜는다.
"여전히 그 괴물 같은 칼을 쓰는 건가?"
"손에 익은 건 버리기가 힘들지."
백호는 두 손으로 감싸 쥔 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몸을 낮췄다. 사냥감에게 덤벼들려는 호랑이처럼.
검룡은 왼손에 쥔 칼을 비껴 들었다. 발톱을 세운 용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발을 내디디며 칼을 휘둘렀다. 칼과 칼이 부딪히고, 불꽃이 튀어 오르고, 청아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전쟁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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