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 나라에는 외국의 귀신을 숭배하고 외국에 충성하며 외국의 이득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넘쳐나게 됐습니다."
제 1장. ENSIS DRACO (2)
"선전포고라고?"
경악, 요한네스 그레고리우스 17세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예순 다섯, 늙었지만 여전히 패기를 잃지 않은 몸뚱이가 벌떡 일어섰고, 호사스럽게 장식된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넓은 방이었다. 굵은 기둥과 넓은 원호를 그리는 아치가 높은 천정을 떠받쳤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뚫린 넓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부채꼴로 퍼지며 방 안을 밝혔다. 벽은 아름다운 성화(聖畵)로 장식되고,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에는 수수한 검은 원탁이 놓여졌다.
그 원탁의 가장자리를 짚고 일어선 사람은 교황, 그 맞은편에서 유령처럼 부유하는 것은 진홍색 주케토(사제들이 쓰는 작은 모자)를 쓰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 오십 대 중반의 동양인 사제. 동북아시아 교구를 관장하는 양정운 추기경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입술을 움직여 허공에 한국어를 그렸지만 스피커에서 걸러져 나온 것은 완벽하게 번역된 이탈리아어였다.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교황 성하, 오늘 저녁 11시를 기해 고려 공화국의 민족종교 동맹이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추기경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것은 공포라는 이름의 그림자.
"그리고 놈들은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도봉구 창동 성당에 은신하고 있던 요셉 신부를 습격했습니다."
"달랑베르를?" 교황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라면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겠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정운 추기경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교황은 눈을 부릅떴다.
"설마하니 십자검의 기사가 패배했단 말이오?"
"예, 방금 전, 여기 시간으로 자정 무렵에 연락이 왔습니다. 십자검의 기사는 쓰러지고, 성당은 불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달랑베르는 한 줌의 재가 되었나이다."
"주여, 그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교황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우리는 순교자의 피를 피로써 받아내야 할 거요. 대체 십자검의 기사를 해친 자가 누구요?"
추기경은 잠시 머뭇대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그를 쓰러트린 건 검룡이라 합니다."
검룡,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교황의 입에서 마치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엔시스 드라코!"
"그렇습니다. 기독교도의 악몽이, 사탄의 용이 부활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 교황이 중얼거렸다. "놈은 싸움에서 오른팔이 잘리고, 지하감옥에서 정신을 잃고 폐인이 됐단 말일세."
"어쩌면 우릴 속였던 건지도 모르죠." 양정운 추기경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중요한 것은 놈이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래, 맞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교황은 자신의 머리 옆에 드리워져 있던 긴 끈을 잡아당겼다.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교황의 등 뒤에 있던 커다란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하얀 사제복을 입은 청년이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나타났다.
"베르투치오, 당장 '6인 회의'를 소집하게."
젊은 사제는 푸른 눈을 깜박이며 조심스레 머리를 들었다.
"교황 성하, 다른 다섯 분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신자들이 전쟁을 선포하고 우리들의 목젖에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잠든 자가 있다면 내 이름으로 전하라, 지금은 침대에 편히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고!"
늙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7세의 호령에 베르투치오는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교황 성하의 명을 거행하겠나이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어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있는 방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우리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때가 왔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가느다란 몸에 먹물을 먹인 두루마기를 입고 대나무 방석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결이 고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드리우고 넓은 이마엔 순백의 두건을 둘렀다. 얼굴, 핏기가 없이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 칼로 자른 듯이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그러나 가면을 쓴 듯이 무표정한 얼굴, 머나먼 앞날과 넓은 세상을 헤아리는 심원하고 현명한 눈빛, 결단력이 응집된 얇은 입술.
그는 증산도의 도주(道主), 현진(賢辰) 이명휘였다.
"그렇소, 도주의 말대로 지난 수백여 년간의 빚을 되갚아줄 때가 도래한 거요."
쪽빛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넓은 어깨, 두꺼운 목, 크고 넓은 얼굴, 마치 범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그러나 증오를 증오로 되갚는 것은 과히 현명한 길이 아닌 듯 하외다."
그것은 늙은 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왜소한 몸에 낡은 가사를 걸치고, 얼굴은 평평한 곳이 없을 정도로 쭈글쭈글했지만, 가늘게 떠진 두 눈에선 형형한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법연(法淵) 대사님. 그들이 뿌린 증오의 씨앗이 얼마나 크고, 거기서 내린 증오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증산도주 현진의 말에, 노승은, 불교계의 대표로 동맹 회의에 참석한 법연 대사는, 입을 오므리고 길게 한숨을 쉰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외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없습니다." 중년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놈들을 꺾어 이 땅에서 먼지 쓸듯이 몰아내야 합니다."
단호하고 결연한 의지, 그것은 천도교 교주 감산(橄山) 이영일의 의지였다. 그리고 현진은 그의 말에 힘을 더해줬다.
"대사님, 한낮 미물은 물론이고 원수의 목숨조차 아끼는 대사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조들이 흘린 피 값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고 무능한 후손이 될 뿐입니다."
법연 대사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찌 그대들의 말을 틀렸다고 할 수 있겠소?" 그러더니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하외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동맹 회의에서 물러나고자 하오."
그러자 감산이 화들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이까?"
"이제 내 나이도 여든이 넘었소.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는 없소이다."
"그래서 이번 출정식에 청허(靑虛) 선사를 보내신 거군요?"
현진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법연 대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청허는 선무도(禪武道)의 맥을 잇는 자이니, 내 뒤를 이을 만 하오. 앞으로 잘 부탁하는 바외다."
"불교계 제일의 무승(武僧)으로 이름 높은 청허 선사가 승군(僧軍)을 이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해지는군요." 감산은 법연 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대사님께서 물러나신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은퇴한 뒤의 거취는 정하셨는지요?"
"이 땡추는 인적 없는 암자를 찾아 불도를 닦고자 하오. 속세(俗世)의 일은 물론이고 교계(敎界)의 일도 완전히 연을 끊을 것이니, 그대들하곤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외다."
법연 대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고, 현진과 감산은 그 앞에 길게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대사님께서 부디 큰 도를 깨우치시길 엎드려 기원하나이다."
"늙은 땡추가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외다."
맞절을 하고 고개를 드는 법연 대사의 얼굴에선 이미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짧게 염불을 외운 뒤에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인연을 끝낼 때가 되었군요. 이제 이 늙은이는 암자에 숨어,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부처님께 빌고 또 빌겠소이다."
노승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무너지더니, 강렬한 빛을 연기처럼 흩뿌리며, 산산이 분해되었다. 홀로그램이 꺼진 것이다.
"나는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영광된 승리를 알릴 날이 오도록 한울님께 빌고 또 빌겠소이다." 천도교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정식에 늦겠소이다, 도주. 어서 갑시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면서, 천도교주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사방을 지배하는 것은 고요하고 적막한 어둠, 그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증산도주 현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예정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 계속 -
제 1장. ENSIS DRACO (2)
"선전포고라고?"
경악, 요한네스 그레고리우스 17세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예순 다섯, 늙었지만 여전히 패기를 잃지 않은 몸뚱이가 벌떡 일어섰고, 호사스럽게 장식된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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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방이었다. 굵은 기둥과 넓은 원호를 그리는 아치가 높은 천정을 떠받쳤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뚫린 넓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부채꼴로 퍼지며 방 안을 밝혔다. 벽은 아름다운 성화(聖畵)로 장식되고,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에는 수수한 검은 원탁이 놓여졌다.
그 원탁의 가장자리를 짚고 일어선 사람은 교황, 그 맞은편에서 유령처럼 부유하는 것은 진홍색 주케토(사제들이 쓰는 작은 모자)를 쓰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 오십 대 중반의 동양인 사제. 동북아시아 교구를 관장하는 양정운 추기경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입술을 움직여 허공에 한국어를 그렸지만 스피커에서 걸러져 나온 것은 완벽하게 번역된 이탈리아어였다.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교황 성하, 오늘 저녁 11시를 기해 고려 공화국의 민족종교 동맹이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추기경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것은 공포라는 이름의 그림자.
"그리고 놈들은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도봉구 창동 성당에 은신하고 있던 요셉 신부를 습격했습니다."
"달랑베르를?" 교황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라면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겠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정운 추기경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교황은 눈을 부릅떴다.
"설마하니 십자검의 기사가 패배했단 말이오?"
"예, 방금 전, 여기 시간으로 자정 무렵에 연락이 왔습니다. 십자검의 기사는 쓰러지고, 성당은 불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달랑베르는 한 줌의 재가 되었나이다."
"주여, 그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교황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우리는 순교자의 피를 피로써 받아내야 할 거요. 대체 십자검의 기사를 해친 자가 누구요?"
추기경은 잠시 머뭇대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그를 쓰러트린 건 검룡이라 합니다."
검룡,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교황의 입에서 마치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엔시스 드라코!"
"그렇습니다. 기독교도의 악몽이, 사탄의 용이 부활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 교황이 중얼거렸다. "놈은 싸움에서 오른팔이 잘리고, 지하감옥에서 정신을 잃고 폐인이 됐단 말일세."
"어쩌면 우릴 속였던 건지도 모르죠." 양정운 추기경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중요한 것은 놈이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래, 맞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교황은 자신의 머리 옆에 드리워져 있던 긴 끈을 잡아당겼다.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교황의 등 뒤에 있던 커다란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하얀 사제복을 입은 청년이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나타났다.
"베르투치오, 당장 '6인 회의'를 소집하게."
젊은 사제는 푸른 눈을 깜박이며 조심스레 머리를 들었다.
"교황 성하, 다른 다섯 분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신자들이 전쟁을 선포하고 우리들의 목젖에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잠든 자가 있다면 내 이름으로 전하라, 지금은 침대에 편히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고!"
늙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7세의 호령에 베르투치오는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교황 성하의 명을 거행하겠나이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어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있는 방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우리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때가 왔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가느다란 몸에 먹물을 먹인 두루마기를 입고 대나무 방석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결이 고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드리우고 넓은 이마엔 순백의 두건을 둘렀다. 얼굴, 핏기가 없이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 칼로 자른 듯이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그러나 가면을 쓴 듯이 무표정한 얼굴, 머나먼 앞날과 넓은 세상을 헤아리는 심원하고 현명한 눈빛, 결단력이 응집된 얇은 입술.
그는 증산도의 도주(道主), 현진(賢辰) 이명휘였다.
"그렇소, 도주의 말대로 지난 수백여 년간의 빚을 되갚아줄 때가 도래한 거요."
쪽빛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넓은 어깨, 두꺼운 목, 크고 넓은 얼굴, 마치 범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그러나 증오를 증오로 되갚는 것은 과히 현명한 길이 아닌 듯 하외다."
그것은 늙은 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왜소한 몸에 낡은 가사를 걸치고, 얼굴은 평평한 곳이 없을 정도로 쭈글쭈글했지만, 가늘게 떠진 두 눈에선 형형한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법연(法淵) 대사님. 그들이 뿌린 증오의 씨앗이 얼마나 크고, 거기서 내린 증오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증산도주 현진의 말에, 노승은, 불교계의 대표로 동맹 회의에 참석한 법연 대사는, 입을 오므리고 길게 한숨을 쉰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외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없습니다." 중년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놈들을 꺾어 이 땅에서 먼지 쓸듯이 몰아내야 합니다."
단호하고 결연한 의지, 그것은 천도교 교주 감산(橄山) 이영일의 의지였다. 그리고 현진은 그의 말에 힘을 더해줬다.
"대사님, 한낮 미물은 물론이고 원수의 목숨조차 아끼는 대사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조들이 흘린 피 값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고 무능한 후손이 될 뿐입니다."
법연 대사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찌 그대들의 말을 틀렸다고 할 수 있겠소?" 그러더니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하외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동맹 회의에서 물러나고자 하오."
그러자 감산이 화들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이까?"
"이제 내 나이도 여든이 넘었소.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는 없소이다."
"그래서 이번 출정식에 청허(靑虛) 선사를 보내신 거군요?"
현진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법연 대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청허는 선무도(禪武道)의 맥을 잇는 자이니, 내 뒤를 이을 만 하오. 앞으로 잘 부탁하는 바외다."
"불교계 제일의 무승(武僧)으로 이름 높은 청허 선사가 승군(僧軍)을 이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해지는군요." 감산은 법연 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대사님께서 물러나신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은퇴한 뒤의 거취는 정하셨는지요?"
"이 땡추는 인적 없는 암자를 찾아 불도를 닦고자 하오. 속세(俗世)의 일은 물론이고 교계(敎界)의 일도 완전히 연을 끊을 것이니, 그대들하곤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외다."
법연 대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고, 현진과 감산은 그 앞에 길게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대사님께서 부디 큰 도를 깨우치시길 엎드려 기원하나이다."
"늙은 땡추가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외다."
맞절을 하고 고개를 드는 법연 대사의 얼굴에선 이미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짧게 염불을 외운 뒤에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인연을 끝낼 때가 되었군요. 이제 이 늙은이는 암자에 숨어,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부처님께 빌고 또 빌겠소이다."
노승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무너지더니, 강렬한 빛을 연기처럼 흩뿌리며, 산산이 분해되었다. 홀로그램이 꺼진 것이다.
"나는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영광된 승리를 알릴 날이 오도록 한울님께 빌고 또 빌겠소이다." 천도교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정식에 늦겠소이다, 도주. 어서 갑시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면서, 천도교주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사방을 지배하는 것은 고요하고 적막한 어둠, 그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증산도주 현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예정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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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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