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철혈무쌍(鐵血無雙) (5)
그 말에 현지위는 깜짝 놀라 큰소리로 물었다.
"누명이라고요? 사제가 정녕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렇소." 장손혁은 어깨를 으쓱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런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하는 궁색한 변명이었을 거요. 생각해 보시오. 당신이 살인죄를 뒤집어 썼다면 어쩔 거요? 몽고로 도망치겠소, 아니면 여기 남아서 자신의 죄없음을 증명하고 진범을 잡아내겠소?"
"당연히 진짜 범인을 잡아 처단해야죠."
"그렇소, 그것이 강호인이오. 강호인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 그것이 그의 유죄를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에 다름없소." 장손혁은 그렇게 단언했다. "그래서 녀석이 술에 곯아떨어져 머리를 모로 돌려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을 때, 그 때 칼을 놀려 목을 베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소."
그 말에 현지위는 충격을 받아 얼굴이 핼쑥해졌다.
"사제가 자고 있는 사이에 칼을 썼단 말입니까?"
"그렇소."
"어떻게 그런 비겁한 짓을!"
장손혁은 현지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난 비겁한 놈이오. 철두철미하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전혀."
현지위는 분노가 치솟았다. 비록 사형을 해치는 패악무도한 짓을 저질러 사문의 공적으로 몰리긴 했지만 허윤은 그의 사제였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무술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며 친구보다 두터운 정을 쌓은 사이였다. 그런 사제와 정정당당하게 무술을 겨루긴커녕 술취해 자는 틈을 노려 수급을 취하는 잔꾀를 부렸다는 사실은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다.
"당신처럼 비겁하고 뻔뻔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나는 비겁하다는 말과 뻔뻔하다는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오. 고맙소."
장손혁이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수하니 현지위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품에 안겨 여태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진랑랑이 입을 열었다.
"비겁한 사람이 오래 살긴 한다고 하더라고요."
"넌 입 닥치고 있어라. 혀 깨무니까." 장손혁은 그녀에게 핀잔을 주고선 다시 현지위에게 눈을 돌렸다. "당신이 날 이해할 수는 없을 거요. 이해할 필요도 없을 테고."
현지위는 왜냐고 물었지만 장손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래바람이 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가 섞인 바람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들은 얼굴을 가린 천을 단단히 싸매고 조용히 말을 몰았다. 정오의 태양이 떠오르고 불길같이 타오르는 저녁 노을이 그들을 덮치고 시린 냉기와 깊은 어둠이 사방에 깔릴 때까지.
뺨을 차갑게 적시는 새벽 이슬에 눈을 떴다. 모닥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장손혁은 헤진 이불을 챙겨들고 흩어진 말을 모았고 현지위는 잠이 덜 깨 연신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떨구는 진랑랑을 껴안고 말등에 올랐다. 그들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폐속까지 찔러드는 모래가 섞인 북풍이 잦아들고 사막이 멀어지고 머나먼 지평선에서 밝은 해가 득달맞게 달려와 싸늘함을 단숨에 걷어내고 따스함을 던졌다. 완연한 아침이었다.
일행은 야트막한 구릉을 등지고 모여앉아 주먹밥으로 대강 배를 채웠다. 헝겊으로 단단히 동여맸음에도 불구하고 주먹밥엔 굵고 가는 모래가 성기성기 섞여 들어가 한 입 깨물 때마다 서걱이는 소리가 혀끝을 간질였다. 대강 요기를 하고 다시 얼굴에 천을 둘둘 말고 안장에 앉아 말에 박차를 가했다. 셋 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슬슬 해가 중천에 걸렸을 무렵, 바람이 가라앉았다. 진랑랑은 배가 고프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칭얼댔고 현지위는 얼굴을 감싼 천을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장손혁은 산길을 어슬렁대는 여우와도 같은 눈길로 오래된 왕릉보다 을씨년스럽고 무너진 궁전의 주춧돌만큼이나 투박한 북변(北邊)의 풍경을 관찰했다. 건조한 공기는 누런 모래가 얕게 깔린 흙바닥 위를 맴돌다가 푸석푸석한 사암(沙岩)이 벽돌처럼 층지어 쌓인 언덕배기에 부딪히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한동안 목적 없이 떠돌던 눈은 저 멀리 남쪽의 야트막한 구릉 아래에서 날카롭게 곧추섰다. 사람의 그림자, 십수 명은 됨직했다. 장손혁은 코밑을 가린 천을 들추면서 말했다.
"말 탄 놈들도 섞여 있군."
현지위도 상당한 내공을 쌓은데다 남다른 안력(眼力)을 가지고 있었다. 숫자는 적어도 스무 명, 말 탄 사람이 셋이란 사실을 포착하고선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도적떼일까요?"
"이런 허허벌판엔 마적 떼도 오지 않소." 장손혁의 말이었다. "엊그제 당한 걸 되갚으려는 놈들이 분명하오."
현지위는 입술을 깨물더니 랑랑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장손대협, 랑랑을 부탁합니다. 저 놈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하지만 장손혁은 랑랑을 받을 생각도 않고 물끄러미 현지위를 쳐다보기만 했다.
"독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공이 채 회복되지도 않았을 텐데, 저 숫자를 혼자서 상대하겠다는 건 만용이오."
그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채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독기 때문에 몸놀림이 둔해졌고 내공을 제대로 운용하기도 버거웠다. 게다가 말을 탄 상대가 셋이나 되니 혼자서 정면으로 부딪히면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웠다. 현지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저 사교(邪敎)의 무리들과 원한을 쌓은 것은 저와 저희 사문입니다. 장손대협께서 이미 절 구해주신 은혜가 있는데 어찌 다시 신세를 질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피식, 코웃음 치는 소리, 그리고 장손혁의 목을 두른 올이 굵은 헝겊 사이로 킬킬대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신세? 너무 거창하군. 나는 특별히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진 않소. 그러니 당신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시오."
현지위는 쓴웃음을 짓더니 그에게 의심이 서린 눈길을 던졌다.
"다시 또 저들에게 내 목에 은자 서른 냥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십니까?"
"나란히 말을 달리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 강호의 의리요. 더군다나 나는 한 번 물어본 걸 두 번 물어보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면서 장손혁은 현지위를 물리치듯이 손짓을 했다.
"당신은 저 구릉 반대편으로 돌아서 몸을 숨기시오. 나는 여기서 놈들을 맞겠소."
현지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때는 승부를 피하는 것이 제일 좋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경우에는 이길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고 어떻게든 뚫고 나갈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다가 포위당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포위당하면 끝장이란 사실을 모르십니까? 대체 어쩔 셈입니까?"
현지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장손혁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걱정 말고 빨리 가시오. 놈들이 오고 있소."
"저도 여기 남아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부상자는 필요 없으니 어서 피하기나 하시오. 다만 조랑말은 남겨 두시오. 당신보다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
거듭되는 재촉, 모욕적인 권유에 현지위는 내키지 않는 후퇴를 해야만 했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길가에 늘어선 앙상한 관목 숲을 지나 주먹만한 자갈이 굴러다니는 경사진 비탈을 타고 올랐다. 구릉을 완전히 돌아가기 직전에 문득 고삐를 잡아당겨 흑마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보니, 장손혁이 얼굴에 두른 헝겊을 조이면서 남은 말 네 필을 어르고 달래어 자기가 탄 말 앞에 모았다.
"아저씨, 걱정 말아요. 저 사람은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을 테니까요."
진랑랑의 말에 현지위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철혈무쌍 장손혁은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살아날 방도를 찾아낼 사람이라고요."
현지위는 고삐를 늦춰 잡아 천천히 말을 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어떤 방도를 찾아낼 지 궁금해지는군.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