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철혈무쌍(鐵血無雙) (4)
흑마에 올라탄 현지위는 진랑랑을 앞에 태우고 말고삐를 잡았다. 그가 앞장서서 길을 잡으니 장손혁이 뒤에서 다른 말들을 몰면서 천천히 뒤따라 왔다. 현지위는 문득 얼굴을 가린 천자락을 슬쩍 걷어내고 목청을 높여 말했다.
"그 말들은 그냥 남겨두고 오는 편이 더 좋았을 뻔 했군요."
장손혁은 손가락으로 두꺼운 천을 벌려 입술을 드러내며 이렇게 답했다.
"그 무슨 소리요? 비록 비루먹은 말들이지만 한 필에 면포 일흔 필은 충분히 받아낼 수 있을 거요. 이런 좋은 돈벌이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소."
그는 안장꼬리에 허윤의 목이 든 상자를 비끄러 맸고 등자끈 옆에는 길다란 작대기를 꿰어 걸쳤다. 안장덮개의 좌우로는 커다란 가죽 보따리를 주렁주렁 매달았는데, 매듭 사이로 칼자루와 창자루가 튀어나온 걸 보면 아무래도 무기가 담긴 것 같았다.
그 꼬락서니가 어찌나 볼품이 없던지, 강호에 이름난 무인(武人)이라기보다는 막 돼먹은 장사꾼에 가까웠다.
"그 짐들은 다른 말들에 싣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소. 이건 내 밑천이자 생명줄이니까."
현지위는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만 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그래서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장손대협께선 제 사제를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저 역시 지난 몇 달 동안 몽고 벌판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지만 그 흔적조차 잡을 수 없었습니다."
장손혁은 한동안 그의 옷차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몽고에서 그 옷을 입고 돌아다닌 거요?"
"예, 그렇습니다만."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오." 장손혁은 단언하듯이 말했다. "불과 삼 사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몽고인들은 중원을 호령하고 다녔소. 하지만 지금은 춥고 쓸쓸한 벌판으로 쫓겨나 오들오들 떠는 신세요. 그러니 당신처럼 명나라 옷을 입은 사람을 고운 눈으로 볼 리가 없잖소?"
그제서야 현지위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눈에 불똥이 튀도록 이마팍을 두들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몽고에 가자마자 그곳 사람들의 옷을 사서 입었소." 장손혁은 자신의 가죽옷을 손으로 팡팡 두들겼다. "보다시피 나는 그곳 사람들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해서 옷만 바꿔 입으면 겉보기엔 별 차이가 없소이다. 하지만 그곳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면포 다섯 필로 몽고인을 꼬드겨 몸종으로 삼았소."
"그 다음에는요?"
진랑랑이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쑥 내밀며 묻자, 장손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말에 올라탔으면 어린애는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라. 혀 깨무니까."
랑랑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장손혁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한인(漢人)들이 모여 사는 곳을 중심으로 돌아다녔소. 몽고인들이 쫓겨갈 때 그들을 따라간 한인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소. 그들은 몽고의 옷을 입고 몽고의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몽고인처럼 말과 소를 데리고 초원을 떠돌아 다니는 버릇만은 배우지 못했소. 대체로 끼리끼리 뭉쳐서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짐승 가죽을 면포와 금은으로 바꿔 주는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소. 한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몇 군데 되지 않았지만 서로간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오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소."
장손혁은 말고삐를 쥔 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몽고 초원 깊숙이 숨어 있는 한인 집락촌에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소. 몇 달 전에 중원에서 넘어온 한인 하나가 근방을 통솔하는 족장(族長)의 호위 무사로 발탁되었다는 거요. 좀 더 깊숙이 캐물어 보니 그 자는 이 근방에선 보기 드물게 인상이 허여멀건 젊은이라고 했소. 게다가 평소 한인들을 믿지 않던 몽고인 족장을 감복시킬 정도로 뛰어난 무술을 갖추고 있다는 거요. 그의 이름은 왕보보라고 했지만, 그게 본명일 리 없다고 생각했소."
"허윤이었군요."
장손혁은 현지위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뇌물을 써서 족장의 파오(천막)에 가까이 접근했소. 호위 무사 중에서 녀석을 찾아내는 건 별로 어렵잖은 일이었소.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더라도 인상까지 바꿀 수야 없으니까. 하지만 녀석의 목을 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소. 주변에는 족장의 파오를 감싸듯이 수십 채의 파오가 방패처럼 세워져 있었소. 호위 무사단은 총 마흔 명이었는데 스무 명씩 두 개 조로 나뉘어 밤낮으로 교대를 했소."
"정말 쉽지 않았겠군요."
"하지만 제아무리 단단한 성벽에도 틈새는 있기 마련이오." 장손혁의 말이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파오를 세우고 숙박하며 호위 무사 중에서 제일 나이어린 녀석에게 접근했소. 한 달 내내 배가 터지게 고기를 먹이고 코끝까지 잠길 정도로 술을 먹이며 보잘것없는 애송이 녀석을 천하 제일의 영웅으로 추켜세워 줬소……"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글넓적한 젊은이였다. 이름이 카탄 오부르였던가, 타탄 오무르였던가, 여하간 그 비슷한 이름이었다. 보통 때라면 이름은커녕 인상조차 기억하지 못할 잔챙이 중의 잔챙이였지만, 노력 없는 보상이 없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기에, 그리고 달콤한 아첨은 아주 값싼 노력이었기에, 그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장손혁은 몽고 귀족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난 괴짜 한족 행세를 아주 완벽하게 해 냈다. 왠 얼빠진 한족 녀석이 막내둥이 오무르를 영웅처럼 모시고 귀한 손님의 예로써 대접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다른 호위무사들이 분기탱천하여 장손혁의 파오를 찾아왔다. 그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 녀석은 당신에게서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소! 왜나하면 이 근방에서 진정한 영웅 호걸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오.'
겸손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대단히 보기 드문 행동 양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원숭이보다 나은 점이라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짝짓기를 해 대는 왕성한 성욕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 패거리를 이루어 물고 뜯고 싸운다는 점에서는 원숭이보다 더욱 지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누구든지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못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지나친 자기 과신에서 비롯된 오만함을 건전한 자존심으로 착각하고 있는 얼간이들이다.
하지만 장손혁은 그 얼간이들에게 겸손을 가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찾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고 자신의 파오로 친절하게 받아들여 화려한 술판을 벌였다. 말젖으로 만든 역겨운 술, 그러나 술은 술이었다. 마시면 취하고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장손혁은 몽고인들의 눈이 돌아갈 정도로 어여쁜 여인을 붙여 주고 귀가 잠길 때까지 술을 먹이고 이성이 날아갈 때까지 아부를 했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술을 공짜로 사 주는 사람은 환영 받는 법이다. 덜 떨어진 괴짜 한족에서 괜찮은 호구로, 더 나아가 유쾌한 친구로 인정받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몽고인들에게서 인정받는 게 아니었다.
은자 서른 냥짜리 머리, 허윤이 그의 목표였다.
허윤은, 여기서의 이름 왕보보는, 장손혁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같은 한족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서 사냥감을 쫓는 야생 동물의 흉포함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손혁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접근하며 성벽처럼 엄중한 경계심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뜨렸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양을 키우듯이 끈질기고 정성스럽게.
끝내 허윤은 굴복했다. 장손혁을 친구로 인정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풍족한 중원에서 빈곤한 초원으로 쫓겨와 잃은 것이 많았던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몽고인들과 지내며 쌓인 것이 많았던지, 그는 장손혁과 어울려 술을 마실 때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잘 취했고, 잘 웃었고, 그만큼 잘 울었다. 장손혁은 함께 취하고,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는 척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소. 허윤은 그 동안 얻어먹은 답례를 하겠답시며 자신의 파오에 거나하게 술판을 차렸소.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단 둘이서 오붓하게 말술을 퍼먹었소. 녀석은 머리 꼭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취해서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원래 자신은 산동 지방에서 이름을 날리던 무림인이었다는 둥, 청풍당 당주 허윤이라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둥,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였소. 하지만 녀석은 사형을 죽였다는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소. 머리에 핏대를 세우면서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누명이라고 강변하며 더러운 침을 튀겼소."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