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후 조선은 왜 멸망하지 않았는가?
전 역사학도는 아닙니다만, 이건 정말 황당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생산력의 척도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경작지였습니다. 경작지를 개간하는 속도는 대단히 느렸고 가뭄이나 홍수 피해로 농토가 유실되어 생산력이 급감하는 사례는 매우 잦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를 보면, 가뭄이나 홍수, 메뚜기떼로 인해 생산력이 급감하고 경제가 붕괴되어 금 백 냥으로도 쌀 한 섬을 사지 못할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빈곤해졌을 때, 대동란이 일어나 왕조가 교체되곤 했습니다.
러시아도 1차 대전 당시 독일에 대패하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은 직후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현대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으로 경제 기반이 파괴된 직후에 치열한 내전이 일어나 농민들의 일방적인 지지를 받은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대륙을 평정했죠. 소비에트 연방도 연방 경제가 파탄난 직후에 산산조각났고, 루마니아 역시 경제적으로 철저하게 몰락한 뒤에야 시민 혁명이 일어나 차우셰스쿠가 축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다른 사례가 필요할까요? 아마 필요없겠죠.
보통은,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이 극에 달한 순간 정권 교체의 방아쇠가 되는 동란이 일어납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중국의 대동란 직후나 유럽의 페스트 유행 직후와 마찬가지로, 노동력 감소로 인해 노동계급(이 당시에는 농민)의 입지가 넓어지고, 황무지를 개간해 자신의 땅을 삼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겠죠.
자본이 총소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로 베이스에서 공평하게 새출발을 하게 되는 시기에는 정권 교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가 경제가 파탄나고 소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이가 벌어져서 내일의 희망이 없어지면,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동란을 일으켜 나라를 뒤집어 엎는 계기가 되죠. (16일 추가) 이 때, 중앙에 못지 않은 경제력을 갖춘 특정 세력이 발흥해 정권을 찬탈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쿠바나 이란에서의 혁명이 그랬듯이, 경제력은 고사하고 생산력조차 없는 세력이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획득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역사엔 가정이 필요없다지만, 만일 6.25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구 지주 계급의 상당수가 자연스레(?) 소멸하지 않았다면, 현대 대한민국은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법의 실패로 인해 진작에 뒤집어 엎어지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정권이 들어섰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