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잘 쓴 건 아닙니다만,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 제 1장: 철혈무쌍(鐵血無雙) (2)
백하응은 겁에 질린 손녀를 끌어안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고, 현지위는 칼을 비스듬히 내뻗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네놈들은 뭐냐?"
그러자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나서서 두 자 다섯 치의 예도로 그의 머리통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백신교(白白神敎)의 사람들이다. 최호법을 살해한 자에게 빚을 받으러 왔다!"
백백신교는 삼십여 년 전에 백련교에서 떨어져 나온 종교였다. 언젠가 이 세상에 미륵불이 내려와 백성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 백련교와는 달리 백백신교는 살아 있는 교주를 미륵의 화신으로서 숭상했다. 그렇기에 지각 있는 사람들은 백백신교를 혹세무민의 믿음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백백신교의 교주는 돈을 쓸 줄 알았다. 조정의 관리들을 뇌물로 구워삶고 지방의 수령들에게도 적잖은 돈을 찔러주며 밤낮으로 포교 활동에 매진하여 어리석은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긁어 모았다.
따라서 무림 정파를 자처하는 현무문이 백백신교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현지위는 예전에 관리와 결탁하여 안하무인으로 행패를 부리던 백백신교의 호법을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그 호법은 결국 골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놈 성이 최가였었나? 그거 미처 몰랐던 사실이군." 현지위는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몽고에 있는 우리 신도가 현지위, 네놈이 조만간 중원으로 돌아올 거란 소식을 전서구로 알려줬다. 그래서 여기에 자리를 잡고 너를 기다린 지가 오래다."
"여기서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았겠지만 그 정도 솜씨로 나를 어쩌진 못할 거다. 하나씩 덤빌 필요 없이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그러면서 현지위는 장검을 현란하게 휘둘렀다. 싯퍼런 칼날이 허공을 춤추며 한 무더기의 빛을 뿌리니 사방이 온통 칼빛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백백신교 사람들은 겁을 먹긴커녕 키득키득 웃는 것이었다.
"현지위, 네놈이 그렇게 잘난 척 하는 것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뭐야?"
갑자기 현지위의 등 뒤에서 가냘픈 신음소리와 함께 쿵 하고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백하응이 가슴을 붙들고 바닥에 쓰러진 것이 보였고, 그 옆에서 랑랑이 주저앉아 울부짖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명치 부근에 쇠꼬챙이에 찔린 듯한 통증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현지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낯빛은 핼쑥해졌고 손은 떨렸다.
"독을 쓴 거냐?"
눈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마구간지기에 점소이를 겸한 소년이 움찔거리며 문 밖으로 도망치는 모습, 주인장이 부들부들 떨며 주방 안으로 몸을 감추는 광경이 눈에 잡혔다. 그는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방금 말했잖아. 여기에 자리를 잡고 기다린 지 오래라고. 이곳 주인장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해 술에 독을 타기까지 충분한 여유가 있었지." 우두머리는 칼을 흔들며 호령했다. "자, 어서 저놈의 목을 가져와라!"
여섯 명의 함성이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울렸다.
짧은 칼과 긴 칼과 손도끼가 현지위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여섯 번의 쇳소리와 하나의 비명이 겹쳐졌다.
한 사내가 단검을 떨어트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목 울대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끄응,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입술 사이로 흘리더니 눈을 까뒤집으며 고꾸라졌다. 털썩, 그렇게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다. 우두머리는 입술을 깨물며 부하들을 재촉했다.
"과연 삭풍검(朔風銳) 현지위로구나. 하지만 언제까지고 버티진 못할 게다. 뭣들 하느냐, 주저하지 말고 쳐라!"
다시 한 차례, 흉측한 칼빛이 눈을 멀게 하고 둔중한 쇳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또 한 사람, 선혈이 용솟음치는 손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새빨간 피를 토해내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며 사람의 목소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괴성을 토해냈다.
다른 네 명은 서로 눈치를 보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자객 일당의 우두머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독물에 당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애를 먹는 건 결코 예상치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현지위의 눈에는 싯퍼런 살기가, 칼에는 붉은 피가 뚜렷했다. 그로써 자신이 아직 꺾이지 않았음을 증명했고 자신의 이름 앞에 삭풍검이란 별호가 붙은 이유를 증명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그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백하응이 헐떡이며 숨을 몰아 쉬는 소리와 랑랑이 울부짖는 소리가 귓바퀴를 갉아먹었다. 부젓가락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통증에 진땀이 흐르고 얼굴은 흙빛이 되고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운기조식으로 독을 몰아낼 여유라곤 전혀 없었다.
우두머리가 다시 칼을 들어 공격을 명령하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서른 냥은 어떻소?"
자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에 들어온 몽고식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우두머리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반문했다.
"뭐라고?"
"서른 냥, 당신네들이 죽이려는 저 자의 목에 은자 서른 냥을 줄 수 있겠소?"
허리에 찬 칼자루에 손을 얹는 사내의 눈은 야수처럼 번쩍였다.
이 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타고난 살인자다. 고기를 써는 것보다 간단하게 현지위의 목을 베어올 놈이다. 우두머리는 속으로 그렇게 직감했다. 하지만 가만 놔 둬도 독으로 죽을 놈에게 서른 냥이나 쓰고 싶지는 않았다.
"터무니 없는 소리! 동전 열 닢이라면 모를까, 은자 서른 냥은 어림 없네."
슬쩍 위로 들린 들창코 아래, 일직선을 그린 얇은 입술의 끄트머리가 슬쩍 올라갔다. 사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동전 열 닢이라. 알겠소."
내 목숨이란 고작 동전 열 닢의 값어치밖에 되지 않았단 말인가, 현지위는 비지땀을 흘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시야가 몽롱해지고 팔다리가 저렸지만 이를 악물고 칼을 들었다.
"내 목을 동전 열 닢에 가져가기로 한 걸 후회하게 해 주마."
사내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자객들 사이를 지나며 칼집입을 감싼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코등이를 밀어 올렸다.
"후회할 일은 없을 거요."
불쾌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수백 수천 번을 벼려 만든 왜검의 칼끝이 무수한 선을 그렸다.
귀청을 찢는 비명이 허공을 메우고 시뻘건 피가 바닥에 잔뜩 뿌려졌다.
하지만 그 비명과 피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의 것이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우두머리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이름 모를 사내의 솜씨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너무나 신속하고, 잔인하고, 냉혹한 칼질에 그의 부하 넷의 머리통이 거의 동시에 목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머리가 있던 자리에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는 칼과 도끼를 놓치고 몸뚱이는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자신이 흘린 핏물에 잠긴 머리통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다가 눈을 까뒤집으며 차갑게 굳어졌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 불길한 색깔로 끈적이는 피바다, 방금 전에 손이 잘린 부하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목이 터져라 울부짖으며 버둥대며 일어나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거센 모래바람이 객잔 안으로 불어 닥쳤다. 등잔불이 하나 둘 꺼지며 원초적인 어둠이 살아남은 사람을 급습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두리번거리던 우두머리는 움직임을 멈췄다. 피를 머금은 왜검이 자신의 목젖을 가볍게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칼 버려."
예도가 마룻바닥에 떨어지며 무거운 쇳소리를 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미륵불을 믿는 사람들을 배신했으니 네놈은 죽어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거다."
"여태까지 지은 죄만으로도 무간지옥에 떨어지긴 충분하니 걱정 말게나." 사내는 그렇게 빈정거리며 왼손을 내밀었다. "해독제나 내 놔."
그러자 우두머리는 코웃음을 쳤다.
"독이란 건 상대를 확실하게 해치기 위해서 쓰는 거야. 일일이 해독제를 갖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
"그건 그렇군."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치우는 듯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소리쳤다.
"그럼 죽어라!"
모래바람, 칼바람, 그리고 우두머리의 목은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뜨거운 피가 사내의 얼굴을 덥혔고, 팔다리를 버둥대는 머리 없는 몸통이 옆으로 넘어졌고, 덧없는 인생의 종결을 확인하듯 머리통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마룻바닥을 울렸다.
현지위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사내가 바지춤에 칼을 문대어 피를 닦아내고 다시 칼집에 되돌려 넣는 모습을 쳐다봤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안도해야 할 지, 아니면 더욱 긴장해야 할 지, 삭갈리기만 했다.
그 순간, 가슴팍을 송곳으로 찌르고 뱃속에서 칼부림이 일어나는 듯한 통증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현지위는 칼을 떨어트리고 신음하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손발이 차가워지며 감각이 없어졌다. 그는 죽음이 너무나도 가까이 접근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사내는 반쯤 마비된 현지위의 몸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입을 억지로 벌려 뭔가를 쑤셔 넣었다.
"이걸 먹으시오."
갈색 가루약이었다. 그리고 품에서 가죽 물통을 꺼내 입에 조금씩 흘려 부었다.
"깨끗한 물이니 걱정 말고 마시시오. 어서."
현지위는 입에 머금은 물과 가루약을 목 울대로 넘겼다. 사내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저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뿐이었다. 잠시 후, 현지위의 뱃속에서 무엇인가 부글대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위장이 뒤틀리고,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입을 크게 벌려 묽은 위액과 반쯤 소화된 고기와 새까만 피를 켁켁대며 토해냈다. 눈물과 콧물이 절로 흘렀다. 한참을 게워내니 마비가 조금씩 풀리면서 손끝과 발끝의 감촉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게워낸 뜨뜻미지근한 토사물 속에서 얼굴을 들어올리고 눈을 깜박였다.
백하응 역시 사내가 준 약을 먹고 꾸역꾸역 토사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하얀 수염이 시커먼 어혈이 아닌 진한 선혈로 물든 것을 보고, 사내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신 차려요!"
랑랑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백하응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는 몇 차례 더 피를 토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 대협 덕분에…… 잠시나마 숨을 연장할 수 있어…… 고맙소."
그러나 가죽옷의 사나이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사양하고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뭔가 남길 말은 없소?"
현지위는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대며 그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백하응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더듬거렸다.
"서, 선배님…… 이 못난 놈 때문에…… 이런 위험에 처하게 빠지시다니…… 죄, 죄송합니다."
"아닐세, 이 늙은이의 명운이…… 여기까지인 것을……어쩌겠나……"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랑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애를 부탁…… 내 아내…… 척린호에게…… 연경으로 데려다 주게……"
짧은 경련, 주름진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긴 한숨, 늙은이의 머리가 모로 꺾이며 침묵했다. 반쯤 감기듯이 떠진 눈은 빛을 잃고 깊은 어둠에 녹아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슬픔에 빠진 소녀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붙들고 절규했다. 살아남은 청년은 이마에 피멍이 들 정도로 머리를 마룻바닥에 세게 부딪히며 맹세했다.
"기필코…… 손녀딸을…… 사모님에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그러나 채 독기가 가시지 않은 탓인지, 현지위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듯한 충격에 바닥에 턱을 부딪히며 널브러졌다. 의식이 멀어져 가고 눈이 흐릿해지는 와중에, 죽음과 슬픔과 두려움이 혼돈처럼 몰아치는 피바다 안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은 사내가 백하응의 눈을 천천히 감겨 주며 짧은 염불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