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철혈무쌍(鐵血無雙) (1)
사막의 밤은 도둑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찰나와 다름없는 저녁 노을이 드리워지면 태양이 곧장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면서 거칠고 황폐한 누른 모래벌판에 득달같이 어둠이 달려온다. 한낮에는 황금빛으로 달아올랐던 모래는 땅끝에 걸친 별빛과 하늘에 걸린 달빛을 받아 차갑고 무정한 은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칼날처럼 싸늘한 바람이 땅을 할퀴어 곱디고운 모래를 사방에 흩날리며 구슬프게 목놓아 운다.
초가을, 사막엔 그렇게 쓸쓸한 밤이 계속된다.
광활한 모래바다의 끄트머리에 넓게 깔린 자갈 사이로는 잡초가 듬성듬성 머리를 들이밀고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빈약한 관목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황제의 능묘처럼 펑퍼짐하게 생긴 바위산이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말 한 마리가 겨우 지날만한 좁은 길이 구불텅하게 이어졌는데, 그 끝에는 초라한 객잔이 있었다.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는, 작고 허름하고 보잘것없는 객잔이었다. 얇은 문짝이 삐걱대며 바람에 맞춰 춤을 추고 너덜너덜해진 문풍지는 줏대 없이 흔들렸다. 누런 한지를 덕지덕지 바른 창문에선 흐릿한 불빛과 싸구려 술 냄새가 새어 나왔다. 뒤에는 구멍 뚫린 지붕을 얹은 허술한 마구간이 붙어 있었다.
다시 한 차례 거센 바람이 불었다. 곱디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솟구치며 허공을 맴돌다가 완만한 산세를 따라 낮게 깔렸다. 그리고 산등성이의 좁다란 길에 갈색 조랑말에 올라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는 누렇게 찌든 두루마기를 걸쳤고 허리엔 삼척 장검을 찼고, 모래를 막기 위해 입과 코와 이마에 얇은 천을 칭칭 둘러맸다. 그는 눈구멍 사이로 잔뜩 찌푸린 눈을 쉴새 없이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저것도 객잔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는 인가조차 없는 황무지에 객잔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긴커녕 그 궁색함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바위와 모래뿐인 벌판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어쨌든 벽이 있고 지붕이 있으니 탁 트인 사막보다야 훨씬 낫겠지."
사내는 말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말의 배에 박차를 가했다. 조랑말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산길을 타박타박 내려와 객잔의 흐릿한 불빛을 표적 삼아 느릿느릿 달렸다.
오래 전에 무너지고 불살라져 주춧돌만 남은 궁터조차 흐릿한 달빛 아래에선 시를 짓고 싶은 마음(詩心)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어둠을 등지고 선 추레한 2층 건물은 황량한 벌판에 울적함만 더했다.
그는 앙상한 관목들 사이를 뚫고 돌무더기를 엉성하게 쌓아 만든 우물을 지나, 아무 장식도 없는 밋밋한 문 앞에 말을 세웠다. 그리고 안장에서 내려 문짝을 두들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에 누구 없소?"
잠시 후에 문이 삐걱대며 열리더니 열 살배기 어린 소년이 꾀죄죄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소년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하룻밤 묵으려고 하는데 방은 있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말고삐를 내밀며 말했다.
"말은 마구간에 넣어라. 꼴과 귀리는 충분히 주고."
"예." 소년은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객잔 안으로 고개를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 "손님 하나 들어가요."
그리고 말고삐를 붙잡고 푸르릉대는 말을 달래듯이 천천히 잡아 끌고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사내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도 바깥쪽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마룻바닥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듬성듬성 놓인 탁자는 주저앉을 준비를 끝낸지 오래였고 허수룩한 나무 의자는 앉으면 무너질까 걱정될 따름이었다.
객잔 주인은 주방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몰락해서 흔적만 남은 객잔을 부둥켜 안고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데 지친 중년 사내가 낮게 코를 골 때마다 생쥐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창가의 쓸쓸한 탁자에는 희미한 등잔불을 둘러싸고 장사치 일곱 명이 모여 앉았다. 모진 바람에 시달린 나머지 그들이 입은 옷은 구겨지고 먼지에 절어 볼품없었다. 사내는 자신의 행색도 별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그들을 비웃을 수가 없었다.
가운데 자리에는 조손지간(祖孫之間)으로 보이는 늙은 영감과 어린 소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노인은 연한 푸른빛 비단옷을 입었는데 허리는 꼿꼿했고 솜처럼 하얀 눈썹과 수염을 길게 늘어뜨렸다.
소녀의 나이는 열 두서너 살 가량, 아직 덜 여문 몸에는 붉은 비단옷을 둘렀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의 황태자는 영민하여 제위에 오르면 자신의 뜻을 널리 펼치는데 방해가 되는 번왕(藩王)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후들 중에서 연왕(燕王)은 가히 영걸(英傑)이라 할만 하니 가만히 앉아서 목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황제가 승하한 뒤에는 자연스레 온 천하가 말려드는 피비린내 자욱한 골육상쟁이 벌어질 것이니 어찌 걱정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소녀는 노인의 근심걱정일랑 아랑곳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황제 폐하가 아직 건재하신데 벌써부터 앞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노인은 따뜻한 엽차 한 모금을 마시다 말고 끌끌 혀를 찼다.
"천하의 대세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니, 계집아이란 참으로 어쩔 도리가 없구나."
그들의 이야기를 귀로 흘려 들으면서 사내는 구석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감싼 천을 천천히 풀었다. 넓은 이마, 굵직한 눈썹, 별처럼 빛나는 커다란 눈이 차례로 드러났다. 나이는 스무 살 정도, 살짝 굽어진 매부리코와 일직선으로 그어진 굵은 입술과 단단한 턱이 강인한 인상을 주는 청년이었다.
노인은 슬쩍 눈을 돌려 젊은이의 얼굴을 살피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방금 저 문을 열고 들어와 구석에 앉은 청년의 이야기를 해 볼까?" 그러더니 청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여보게, 현무문 사람이 예까지 왠 일로 온 건가?"
젊은이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인장께선 제가 현무문 사람인 줄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자 소녀는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신 분이세요. 그리고 강호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요."
"랑아. 조용히 있거라." 노인은 근엄하게 손녀를 타이르더니 다시 젊은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네가 현무문 현풍당의 당주, 현지위란 사실도 알고 있지.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으니 이쪽으로 오게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같이 앉아 술이라도 한 잔 하세."
현지위는 늙은이의 얼굴을 뜯어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난 적이라곤 한 번도 없는 노인이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아보는 걸까? 풍채를 보아하니 속된 사람은 아닌 것 같구나. 일단은 이 노인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현지위는 손을 맞잡고 허리를 깊이 숙여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현무문 현풍당의 당주 노릇을 하고 있는 현지위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제 이름과 신분을 손바닥 보듯이 꿰뚫고 계시건만, 이 불만한 놈은 어르신의 함자조차 모르니 참으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청컨대 이 후배에게 어르신의 높으신 이름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선배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을 잊지 않으니 과연 앞날이 기대되는 청년이로구나."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 이름은 백하응이라고 하네."
그 말을 들은 현지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옛? 어르신께서 그 이름 높은 천리이(千里耳) 백하응 선배님이셨단 말씀입니까?"
천리이 백하응.
그는 젊었을 적에 홍군에 투신하여 주원장의 막하에서 참모로 복무하며 크고 작은 공을 여러 차례 세웠다. 하지만 주원장이 '고생은 함께 해도 복록은 함께 하지 못할 관상'이란 사실을 간파하고선 그가 황제로 등극하기 직전에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강호로 돌아왔다.
비록 무공은 높지 않았으나 천하에 떠도는 풍문을 수집하고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능력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바가 아니었다. 무림의 지난 역사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사건과 인물에도 해박했으니 뭇 사람들은 그를 '천리이'라 불렀다.
"그렇네. 그리고 이쪽은 내 외손녀인 진랑랑이라고 하네. 랑아, 너도 인사를 해야지."
"안녕하세요. 현대인."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서로간에 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백하응은 손을 모아 두들기며 큰소리로 말했다.
"주인장, 여기 고기야채 볶음 한 접시와 술 한 동이를 내 오게나."
졸고 있던 주인은 하품을 하며 일어서더니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아까의 소년이 자기 머리통보다 큰 술동이를 지고 쪼르르 달려왔다.
"술, 여기 있습니다!"
술동이에 담긴 술은 걸쭉한 탁주였다. 지독한 냄새에 진랑랑은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현지위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술을 먹게 되었군요. 선배님부터 한 잔 받으십시오."
백하응은 나무 대접을 들어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면서 넌지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몽고 사람들이 먹는 말젖 술에는 익숙해지질 않던가?"
"예, 그랬습니다." 무심코 입을 벌린 현지위는 앗차 하며 낭패한 낯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처럼 초라한 후배의 이름은 물론이고 행적까지 꿰고 계시다니, 과연 천리이 백선배님께선 강호의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으시군요."
"초라한 후배라니? 지나친 겸손함은 지나친 자신감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라네. 현도흥의 조카이자 둘째 제자인 현지위가 여간내기가 아니란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지. 더군다나 현무문 현풍당의 당주가 오죽 높은 자리인가? 이미 강호인들 사이에선 자네 얼굴과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네."
"이 못난 놈을 그렇게까지 추켜세워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헌데 제가 몽고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어찌 아셨습니까?"
"미리 알고 있던 건 아닐세." 노인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다만 그 옷차림을 보고 자네가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을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로써 저 사막 너머 몽고에 다녀온 것이리라 짐작한 걸세. 두 눈 멀쩡히 뜨고서 그 정도 추측도 하지 못한다면 나는 천리이 백하응이 아니라 노망난 노친네에 불과하겠지."
듣고 보니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지위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소녀는 쿡쿡 웃으며 그에게 대접을 내밀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똑똑한지 이젠 아셨죠?"
"과연 네 말대로다." 그는 소녀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백하응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의 지혜로움에는 진심으로 감복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늙은이를 쓸데없이 높이거나 꾸미는 말은 그만 두고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도록 하세."
그들은 잔을 부딪히고 벌컥벌컥 호쾌하게 술을 마셨다. 늙은 협객은 빈 대접을 내려놓고 주름진 손가락으로 수염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일은 바로 이걸세. 현도흥이 자신의 친조카를 몽고 초원까지 보낸 이유가 무엇이냔 말일세. 대명국의 위엄이 미치지 못하고 여전히 몽고족의 원나라(元: 여기선 쫓겨간 몽고족이 세운 북원(北元)을 이른다)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험악한 곳에 대관절 무슨 볼 일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현지위가 대답하길 망설이자 백하응은 껄껄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네. 한 잔의 술은 세상만사를 잊기 위해 마시는 것이지, 알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턱을 긁적이던 현지위는 술동이를 들어 백하응의 빈 술잔을 채우며 이렇게 말하였다.
"특별히 감추거나 숨길만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못된 제자가 있어 문호를 정리하러 갔을 뿐입니다."
문호를 정리하러 갔다는 말에 백하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1년 전에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서 현무문 제자인 임무창이 살해당한 일 때문이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리하고 돌아온 건가?"
"끝내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지위가 참담한 낯빛으로 고개를 저으니 백하응은 다시금 혀를 끌끌 찼다.
"천하가 뒤숭숭하여 황제에게 자식 운이 없기 때문인가? 당대의 영웅인 현도흥에게도 제자 운이 따르지 않는구나. 총애하던 수제자는 비명횡사하고 그를 살해한 넷째 제자는 몽고로 도망쳐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다."
본디 현무문은 산동의 제남(濟南)을 근거지로 삼은 무림 문파였다. 산동 일대에서는 겨룰만한 세력이 없었고 장강 이북에선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리고 지금의 문주인 현도흥은 무공과 지혜와 경험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주원장은 무림인들에게 결코 호의적인 황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백련교(白蓮敎)와 명교(明敎)와 미륵교 등을 모조리 마교(魔敎)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했다. 각양각색의 핑계로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키며 그때마다 무림 정파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처형했다.
때문에 무림인들의 인심은 황실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현무문의 문주 현도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멀리 떨어진 남경의 황제가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심하고 함부로 죽이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황제가 살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안 뒤로는 가까운 곳에 있는 연왕에게 줄을 대기로 결심했다. 그 또한 연왕의 야심이 크고 넓음을 헤아렸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인 임무창을 연왕의 아랫사람으로 보내어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자 했다.
현도흥의 제자 중에서 강호에 이름난 사람이 넷이었으니 첫째가 임무창이며 둘째가 현지위고 셋째가 김일호고 넷째가 허윤이었다. 임무창은 탄탄한 내공을 초석으로 삼고 뛰어난 권법을 기둥으로 세우고 화려한 검기(劍技)를 대들보로 썼다. 게다가 시, 서, 화에 밝고 적당히 풍류를 즐길 줄도 알았으니 가히 준걸이라 부를만했다. 그리고 작년 2월, 연왕부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그 능력을 인정받아 어영청의 대장으로 발탁되었으니 모든 일이 현도흥의 바램 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상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임무창은 어영청 대장의 자리를 고작 사흘밖에 누리지 못하였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 그는 자신의 집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를 깨우러 방문을 열고 들어간 계집종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임무창은 두 손을 팔걸이 아래로 늘어뜨리고 머리를 어깨 사이에 파묻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가슴팍에서 등받이까지 세 자 다섯 치의 장검이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버선발 아래 깔린 서역의 양탄자는 피를 잔뜩 머금고 화려한 빛을 잃고 새까맣게 굳어졌다. 미처 칼을 뽑아 대항할 틈도 없었는지 손가락은 기괴하게 뒤틀린 채 차갑게 식었고, 얼굴은 불신과 의혹으로 차갑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피가 식고 근육이 딱딱해진 상태를 보면 죽은 시간은 자정 무렵인 듯싶었다.
범인은 의외로 쉽게 밝혀졌다. 시신을 수습하러 간 현지위와 김일호는 흉기로 쓰인 장검을 보자마자 그것이 넷째 제자인 허윤의 칼이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윤은 현무문 청풍당의 당주로 검술에 능하고 칼을 좋아하여 여러 자루의 장검을 수집했는데, 임무창을 해친 장검은 그 중의 하나였다.
은밀히 조사해 보니 허윤은 살인이 있었던 밤 이후로 종적이 묘연했다. 사문에 돌아와 그의 방을 뒤져 보니 다른 칼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만 문제의 장검은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현도흥이 대노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현무문의 문주로서 죄지은 제자를 직접 처벌하고자 한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허윤의 목에 은자 서른 냥이라는 막대한 상금을 걸었다. 목이 몸뚱이에 붙어 있건 따로 떨어져 있건 상관없다는 조건이었다.
현지위는 넷째 사제가 대사형을 해쳤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피로써 맺어진 형제를 해쳐 사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규율을 욕보인 배신자에 대한 증오심에 영혼을 불살랐다. 그는 대사형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현풍당의 당주 자리를 이어받기가 무섭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허윤의 자취를 쫓았다. 그리고 그가 중토(中土)를 떠나 대막(大漠)을 건너 야만과 폭력으로 충만한 황무지, 몽고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윤의 자취는 거기서 뚝 끊어지고 말았다.
난다 긴다 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조차 몽고로 가길 꺼려했다. 멀리 이국(異國) 땅에서 사람을 찾고 그 목을 베어 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닐곱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수확도 없었고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현지위는 대사형의 원수를 갚고 사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부를 조르고 졸라 여섯 달 안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몽고로 향했다.
"예,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난 육 개월간 몽고 초원을 헤맸지만 녀석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이렇게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못난 놈을 제자로 둔 사부님께선 과연 제자 운이 없는 분이십니다."
현지위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흙빛으로 질린 얼굴을 떨구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백하응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무슨 소리인가. 황제의 자식운이 없다는 것은 황태자가 일찍 죽은 것을 두고 한 말이며 현무문 문주의 제자운이 없다는 것은 수제자가 일찍 죽은 것을 가리킨 걸세. 자네처럼 충성된 제자를 둔 것은 현도흥의 복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노회한 협객은 현지위의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의 뜻으로 직접 술을 따라 주면서 한탄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나저나 나도 늙긴 늙었어. 나는 자네가 문호를 정리하러 직접 몽고에 갔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네. 다른 이유로 그곳에 갔으리라 여겼지."
"제가 중원을 떠나 몽고까지 갈 만한 이유가 달리 또 있단 말씀이십니까?"
현지위가 술잔을 들다 말고 그렇게 묻자 백하응은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자명검(自明劍)을 찾으러 가는 거지."
폭탄과도 같은 말에 현지위는 술잔을 떨어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자명검!"
텅, 나무를 깎아 만든 대접이 둔한 소리를 내며 탁자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고 묽은 탁주가 철벅, 소리를 내며 방울방울 흩어졌다. 하지만 현지위는 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멍한 눈으로 백하응을 쳐다보기만 했다.
자명검, 그것은 무림의 전설이고 신화였다. 그러나 결코 오래된 전설도 아니었고 낡은 신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주원장이 몽고를 쫓아내고 남과 북을 하나로 합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천하의 혼란은 방금 막 가라앉았을 뿐이었고 사람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으며 무림은 숫제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거센 전란에 휩쓸려 유서 깊은 문파와 방파, 이름난 세가(勢家)들이 차례로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가혹한 전장에서 스스로의 몸을 단련한 영웅 호걸들이 강호에 투신하니 사방에서 새로운 문파와 방파가 난립했다. 그리고 사소한 이득과 보잘것없는 명예를 좇아 여기저기서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이 벌어졌다.
"설마하니 고운독검(孤雲獨劍) 장서평(張誓平)의 자명검(自明劍)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죠. 군호맹의 맹주 장서평 외에 자명검의 주인이 달리 있을 턱이 없잖아요?"
진랑랑이 귀엽게 웃으며 반문하자, 백하응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그렇다. 아주 잘 알고 있구나, 랑랑아." 그는 바닥에 떨어진 대접을 주워서 다시 현지위에게 내밀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30여 년 전, 강호엔 지독한 피바람이 불어 닥쳤지."
"들은 바 있습니다. 여러 문파 사이의 해묵은 원한이 불씨가 되어 시작된 싸움이죠."
"거기에 구 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의 갈등이 겹쳐지니 숫제 기름을 부운 격이었지. 싸움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네." 백하응은 당시를 회상하며 혀를 찼다. "거대한 문파끼리 죽고 죽이고, 작은 방파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뭉쳤다 헤어지기를 되풀이하니 마침내는 아무도 믿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네. 강호의 판도를 그림으로 그려 보자면 마치 깨진 거울과도 같았다네."
그 말을 받듯이 진랑랑이 입을 열어 뽐내듯이 말했다.
"그 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고운독검 장서평이죠."
외로운 구름, 고독한 칼, 장서평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느 문파 출신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장서평이란 이름이 본명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얼굴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으나 진중한 행동거지는 사십 대와 같았다. 결코 미남은 아니었지만 형형한 광채를 내뿜는 눈빛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고 기품 있는 몸가짐에는 위엄이 서렸다. 권법과 검법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한 자루의 장검을 다루는 솜씨가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가 아끼던 양날검의 이름이 바로 자명(自明)이었다.
"종남파의 검사들은 쾌속함을 높이 치고 화산의 도사들은 화려한 검기(劍伎)를 앞세우며 무당의 도사들은 힘이 실린 검법을 위주로 하지. 장서평의 검법은 그들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힘이 실렸지만 둔하진 않았고, 나비처럼 우아하면서 독수리처럼 빨랐다네."
백하응은 잠시 말을 멈췄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객잔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새로운 손님에게 쏠렸다.
두꺼운 몽고식 가죽옷을 입은 한인(漢人) 남자였다. 허리엔 울긋불긋한 술이 달린 왜검을 차고 괴나리 봇짐을 꿴 작대기를 어깨에 걸머졌다.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무시하고 빈 자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사막의 경계선을 오가며 위험하지만 수지맞는 거래를 즐기는, 이 객잔에선 흔해빠지게 볼 수 있는 유형의 장사치임에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관심을 버리고 다시 원래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지.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마침내 검술을 겨루는 광경까지 보았다네. 그가 넉 자 다섯 치의 자명검을 뽑아 들면 그 예리함은 간장과 막야를 방불케 했고 광채는 진시황의 보검과 같았지. 그리고 그가 하얀 두루마기를 휘두르며 자명검을 휘두르면 마치 한 마리의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했다네."
백하응은 눈을 지긋이 감고 먼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지. 외로운 구름과도 같은 사나이였어. 하지만 혹독한 세월은 그에게 고독을 허락하지 않았지. 그의 이름을 이용해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군호맹(群豪盟)이란 모임을 만들었지. 그리고 한사코 사양하는 장서평을 붙들어 맹주로 앉혔다네."
"예, 그리고 군호맹은 화북에서 한중까지 호령하게 되었죠." 현지위의 말이었다.
"맞았어. 진(秦:명조의 협서성 부근, 지금의 감숙성)과 진(晋:섬서성), 조(趙:산서성), 송(宋:하남성), 그리고 제(薺:산동성)와 노(魯:산동성), 연(燕:요령성)의 무림인들은 군호맹의 깃발 아래 일치단결했지. 하남 황리장원(黃李莊園)의 황철이 맹주의 오른팔을 자처하고 당시 현무문의 대제자였던 현도흥이 왼팔을 자임하고 나서니, 사람들은 장서평과 황철과 현도흥을 화북삼걸(華北三傑)이라 불렀다네. 이들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를 듯 하니 장강 아래의 세력은 칼을 접고 물러나 전전긍긍할 따름이었지. 고운독검 장서평이 이끄는 무림맹의 이름 아래 산산조각난 무림이 하나로 합쳐질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네."
그러더니, 백하응은 잠시 말을 쉬고 술로 입술을 축였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음울함이 내려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남 거해방(巨蟹幇)의 방주이자 강남사협의 하나로 꼽히는 이준이 장서평에게 비무를 신청했지. 누가 봐도 승패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지. 비록 이준이 한 자루 협도(狹刀)로 강남태두(江南太頭)란 별호를 얻긴 했지만 결코 장서평의 적은 아니었기 때문일세."
"하지만 결과는 장서평의 패배였죠." 현지위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지. 고운독검 장서평은 무림에서 맹주로 군림하기엔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이었어. 그는 일 대 일로 싸우자는 이준의 청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지. 장서평은 현도흥과 황철, 그리고 호위 무사들을 모두 따돌리고 혼자서 안휘성 황산(黃山) 기슭에 마련된 비무대로 갔다네. 하지만 거기엔 이준만 있는 게 아니었어. 쉰 명에 달하는 강남의 고수들이 운집해 있었지."
"그 다음은 저도 알아요. 함정에 빠져 호랑이와 늑대에게 둘러싸인 외로운 신세가 되었으나, 고운독검은 조금도 겁먹지 않고 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워 삼십여 명의 강남 고수를 목 없는 시체로 만들었죠."
손녀딸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지만 할아버지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섞였다.
"하지만 고운독검 역시 뼈와 살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피를 먹은 자명검은 둔해지고 땀에 절은 옷자락은 무거워지고 숨소리는 점차로 거칠어졌지. 끝내는 이준의 협도에 팔꿈치 아래의 왼팔을 잃고 엄청난 피를 흩뿌리며 무릎을 꿇었지. 둔중한 협도가 그의 목을 치려는 순간, 장서평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자명검을 휘둘러 철옹성 같던 살진(殺陳)을 깨치고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왔지. 그날 이후, 장서평과 자명검의 이름은 강호에서 사라지고 군호맹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단다."
현지위는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언젠가 장서평이 돌아와 군호맹을 재건하고 이준에게 복수를 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지만 아직껏 이뤄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뤄질 수 없을 겁니다. 이준은 이미 여러 해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까요."
"음, 그렇지. 아마 7년인가 8년 전에 노환으로 죽었을 걸세. 비겁한 짓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편한 죽음이었지."
"그런데 선배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제가 자명검을 찾으러 갔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 그것은 말이지……"
갑자기 백하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등 뒤에서 엄습해 오는 살기를 느낀 현지위는 의자를 발로 차며 일어나 허리의 장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허연 칼빛이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의자가 쪼개지고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런!"
현지위를 급습한 사내가 낭패한 표정으로 단도를 접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상대는 모두 일곱 명, 방금 전까지 창가에 앉아 있던 장사치들이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