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메뚜기와 이야기하던 도중 그런 이야기가 나왔죠. 그거 말 되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구상만 하다가 직접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글루스에는 무협소설 분야에서 워낙 쟁쟁한 분들이 많기에, 아마추어가 부족한 글을 올리기가 조심스러워지긴 합니다만... 어쨌건 부정기적으로 조금씩 써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접혀져 있는 글을 클릭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호십삼수 (江湖十三手)
-서장
펼쳐보기
"무림이란 대체 무엇이죠?"
"숲이지. 코가 뒤틀어지는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무사들의 시체를 숨기는 숲."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 높이 걸린 반달과 무성한 별빛이 비탈진 산기슭을 어슴프레 밝혔다. 무성한 솔밭 사이로 구불텅하게 이어지는 인적 없는 외딴 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한 채의 초옥이 주저앉아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허름하지만 아담하고 낡았지만 품격 있는 초옥이었다. 실내는 속된 말로 고양이 손바닥만 했다. 하지만 결코 지저분하거나 더럽지는 않았다.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벽지는 새로 바른지 얼마 되지 않았다. 백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듬어 안은 탁자 위에선 오래된 백자 서등(書燈)의 불빛이 부지런히 춤추며, 서로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의 그림자를 창문에 아로새겼다.
하나는 아름다운 여인, 다른 하나는 무뚝뚝한 사내였다. 여인의 나이는 스물댓 살 정도, 들어갈 곳은 확실히 들어가고 나올 곳은 제대로 나온 탐스럽게 농익은 과일이었다. 몸에는 분홍색 옷을 입고 머리는 높이 얹고 얼굴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몸가짐이나 옷차림은 천박하지 않았지만 전족은 하지 않았다.
사내의 나이는 이십대 후반, 모진 풍파가 눈 밑의 주름살이 되어 박히고 거친 세월은 단단한 근육이 되어 몸을 갑옷처럼 둘렀다. 그는 삐걱대는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왼손으론 턱을 괴고 오른손으론 술잔을 들었다. 탁자에 놓인 접시에선 젓가락 한 번 대지 않은 돼지고기 안주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뭣 때문에 무림에 몸을 담고 있나요? 썩은 냄새를 쫓기 위해서는 아니겠죠?"
여인은 감미로운 소리로 물었고, 사내는 자조적인 말투로 답했다.
"글쎄, 적어도 시체를 파먹는 들개는 굶어 죽진 않지."
"당신 자신이 들개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게 놀랍군요. 호랑이나 사자로 착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내가 그렇게 강한 짐승이 아니란 사실은 잘 알고 있어.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지경이야."
"그런데 무림에서 발을 빼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내가 먹고 사는 수단은 시체를 파먹는 것뿐이거든."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술을 마셨다. 여인은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향기로운 냄새, 정성스레 빚은 백화주(百花酒)였다.
"당신은 이렇게 어둡고 험한 길을 언제나 홀로 다니나요?"
"어두운 밤길에서 뒤를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친구가 없을 때는 그렇지."
"그럴만한 친구가 있기나 하나요?"
"없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믿을 바엔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체를 믿는 쪽이 낫지."
"왜죠? 죽은 자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데?"
"맞아. 하지만 그 놈들은 감히 내 등짝에 칼을 찌를 엄두를 내지 못하지."
그러자 여인은 배시시 가벼운 웃음과 달콤한 말을 흘렸다.
"당신이 봄바람처럼 자유롭고 여름의 태양처럼 거침없고 가을의 구름처럼 편안한 길을 가기를 기원하겠어요."
"고맙군. 하지만 쓸데 없는 기원이야. 나는 한겨울의 고드름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 텅 빈 술잔을 탁자에 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허리에 찬 칼자루에 손을 얹으면서 냉혹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 당신에게도 그래야 할 것 같군."
가시 돋친 말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놀라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았다. 다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요."
"생전 처음 보는 남정네한테 공술을 대접하겠다고 할 때부터 눈치를 챘지. 이렇게 낡아빠진 수법이 통할 것 같나?"
그녀는 깔깔대고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내에게 오만한 눈길을 던지며 거짓된 공손함을 남김없이 털어내고 솔직한 반말을 쏟아냈다.
"낡았지만 확실한 방법이지!"
"그래? 이 수법으로 남자 여럿 잡아먹은 모양이군. 대여섯은 되나?"
"그 이상이지." 그녀는 목을 뻣뻣이 세웠다.
"거 굉장하군. 하지만 이번엔 사람 잘못 봤어. 난 더러운 들개지만 다 마신 술병처럼 머리가 빈 수컷은 아냐."
"그렇게까지 잘난 척 하는 걸 보니 머리가 보통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풍양공자' 초심원이란 이름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서른이 넘는 부녀자를 강제로 범하고 열댓이나 되는 사람을 죽인 개망나니 아닌가? 관아에서 녀석의 목에 은자 닷 냥이란 엄청난 상금을 걸었지만, 명문세가 출신인데다 몸에 지닌 무공도 뛰어나 아무도 그 상금을 가져갈 엄두를 내지 못했지."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적어도 석 달 전까지는 그랬지."
그러자 여인이 눈을 치켜 뜨고 손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겠지. 석 달 전에 네가 그 목을 베었으니까."
"맞아. 그리고 죽은 시체의 모가지로 은자 닷 냥을 받았지. 수지맞는 장사였어."
"네놈은 그의 죽음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느냐?"
사내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친 개 한 마리가 죽었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 그 개의 어미나 아비라면 모르지만."
말을 마치면서 그는 칼을 뽑았다. 넉 자 길이, 성숙한 여인의 등줄기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왜검(倭劍)이었다. 수백 수천 번을 벼린 칼날에는 푸르스름한 살기가 비쳤고, 까실한 상어가죽을 덧댄 칼자루를 굳게 쥔 사나이의 눈에는 무자비한 기운이 감돌았다.
"공명정대한 군자로 이름 높은 초씨세가의 가주 초영신이 망나니 아들을 감싸고 돌던 데서 그치지 않고 원수까지 갚으려 들다니, 과연 아비의 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군." 그의 눈길이 여인이 왼손에 차고 있는 굵은 은팔찌로 향했다. "하지만 금의위(錦衣衛)의 강아지 노릇을 하면서 돈을 긁어 모은 '가단회(佳丹會)'의 힘을 빌릴 줄은 몰랐어."
몽고인들은 동쪽 끝의 고려에서 서쪽 끝의 아라비아, 북쪽의 러시아와 남쪽의 월남까지 정벌했다. 그들의 지치지 않는 정복욕을 만족시키고 끊이지 않는 향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중원의 한족들은 무진장한 착취를 강요당했다. 전쟁이라는 이득보다 손실이 큰 사업을 여러 대에 걸쳐 계속한 결과 영원한 것만 같았던 몽골 제국은 어느새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쿠빌라이 칸이 죽은 뒤로 그 후계자들이 실정(失政)을 거듭하고 흉작이 겹치고 경제가 파탄나면서, 제일 밑바닥에 있던 한족(漢族)들이 쌓이고 쌓인 울분과 원한을 폭발시키듯이 창칼을 들고 일어섰다.
각지에서 영웅이 준동하며 거대한 제국은 수백 조각 사금파리로 부서져 내렸다. 천하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함성이 끊이질 않았다. 여러 해에 걸친 동란을 제압하고 몽고인을 멀리 북쪽으로 쫓아내서 중원 전토를 다시 한족의 손에 되돌려 놓은 것은 명태조 주원장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황제였지만 경쟁자에겐 한없이 잔인하고 교활했다. 온갖 책략을 동원해 앞을 가로막는 정적(政敵)들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참살하고 온 천하를 통일한 뒤로는, 자신이 획득한 권력을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 개국공신과 권문세가를 뿌리뽑는 일에 몰두했다. 호유용(胡惟庸)의 모반사건(1380)에서는 1만 5천여 명이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고 남옥(藍玉)의 모반사건(1393)에선 희생자가 무려 2만에 달했다.
그리고 주원장의 이빨과 손톱이 되어 이러한 옥사(獄事)를 주도한 것은 황실 호위대인 금의위였다. 황제의 지엄한 권위를 등에 업고서, 금의위는 문무의 관리를 감시하고 심문하며 처벌하는 거대한 감찰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수많은 관료와 선비들은 그 이름을 저승사자처럼 여기며 두려워했다.
금의위는 유림의 지식인뿐만이 아니라 무림의 유협들에게도 감시의 눈길을 뻗쳤다. 원말명초의 혼란기에는 엄청난 숫자의 무림인들이 홍군을 비롯한 농민 반란군에 투신하여 원나라를 무너뜨리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가 삶아지는 법이다. 천하가 평정되자마자, 법률보다 협의를 무겁게 여기고 관리를 우습게 보는 무림인들은 감시와 탄압의 대상으로 내몰렸다.
가단회는 산동의 무림 방파로 원래는 소금 밀매 조직의 뒤를 봐주면서 목구멍에 풀칠을 하던 조그만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름없는 흑도 방파의 우두머리로 만족할 줄을 몰랐던 전대(前代) 회주는 자신의 친족을 금의위 위사로 밀어넣고, 그것을 계기로 무림인의 동향을 감시해 금의위에 밀고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 때부터 가단회의 형편이 활짝 피어 오른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순서였고 대다수 무림인이 그들을 멸시하고 미워하게 된 것 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여인은 웃음을 날리면서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을 들었다. 팔찌에 붉은 주사로 선명하게 씌어진 것은 붉을 단(丹)자, 가단회의 상징이었다.
"초영신 어르신께서는 오래 전부터 우리와 손을 잡고 있었다. 강호인들이 그걸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야."
"그래?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 그 사실을 강호에 퍼뜨리면 '청주의 도덕군자'라는 초영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겠군."
"방금 전에 네가 마신 술에는 호랑이도 죽일 수 있는 독이 들어 있었다. 너는 여기서 오직 시체가 되어 나갈 뿐이다."
"호랑이도 죽일 독이라." 그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이봐,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미 죽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설마 독을 마시지 않았단 말이냐? 그럴 리가!"
그는 오른쪽 소맷부리를 슬쩍 걷어 올렸다. 손목에 찬 가죽 보호대에서 손바닥 안쪽으로 가느다란 대롱이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색깔이 피부와 같은 살구색이기 때문에 어두운 등잔불 아래에선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 존재를 미처 알 수가 없었다.
사내는 왼손을 품에 넣어 그 대롱이 연결된 돼지 방광을 꺼내 들었다. 방광을 힘주어 주물럭거리니 손목의 대롱에서 독이 든 술이 줄줄 흘러 내렸다.
"미안하게 됐군. 나는 공짜는 뭐든지 의심하고 사양하는 사람이거든. 이건 촉(蜀)의 성도에서 마술을 부리던 늙은이에게서 배운 수법이지. 어때? 꽤 재미있는 속임수지?"
여인은 가늘고 짙은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사방을 둘러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쳐라!"
굵은 창살로 수(壽)자를 아로새긴 창문이 와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리고 나뭇조각과 얇은 창호지가 흩날리는 속으로 다섯 명의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몸에 검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얼굴은 복면으로 가린 단단한 체격의 사내들이었다. 손목엔 고동색 가죽 보호대를 차고 허리에는 두 자루의 단도를 차고 있었다.
"한 사람을 상대하는데 다섯이나 부르다니 너무 비겁하지 않나?"
여인은 오른손을 반대편 소매에 집어넣어 한 자루 비수(匕首)를 꺼내 쥐며 깔깔대고 웃었다.
"네가 말한 대로 금의위의 개돼지나 다름없는 흑도의 무리가 정정당당한 싸움을 즐길 것 같으냐? 우리는 비겁하다는 말을 비난이 아닌 칭찬으로 여긴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자객들이 단도를 양손에 뽑아 들었다. 시원한 가을 바람에 춤추는 등불이 선홍빛 피를 머금을 욕심으로 가득한 칼날을 희푸스레하게 밝혔다. 오른손에 든 단도는 앞으로 내밀고 왼손에 든 단도는 길게 늘어뜨린 채, 다섯 명의 그림자는 태산처럼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도 사양할 게 없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벽에서 등을 떼며 칼을 두 손으로 잡을 태세를 취했다. 열 개의 눈동자가 그의 칼끝에 집중되는 순간, 그는 몸을 돌리며 왼손을 크게 떨쳤다.
공기가 찢어지며 짧고 경쾌한 바람 소리가 울렸다. 외롭게 흔들리던 등불이 꺼지면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다섯 번 겹쳐졌다. 그리고 어둠이 깔린 마룻바닥에 육중한 몸뚱이가 무너지는 소리가 다섯 번 이어졌다.
부서진 창가에서 쏟아지는 희미한 달빛이 여인의 당혹스런 얼굴을 밝혔다. 날카롭고 무정한 왜검이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찌르고 있었다.
"비수를 치워."
"싫다면?"
"죽여버리겠다."
나직한 신음소리, 비수가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사내가 비수를 멀리 걷어차는 소리, 그리고 패배감에 젖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별 거 아냐. 칼을 쓰는 척 하면서 네 부하들에게 독침을 뿌렸지."
"비겁하다!"
그 말에 사내는 비웃음으로 답했다.
"비난이 아닌 칭찬으로 여기도록 하겠네."
자객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복면 아래에서 게거품을 토해댔다. 사내는 그들에게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말라고. 내일 아침이면 멀쩡하게 일어나서 춤도 출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불편하더라도 남자답게 꾹 참고 하룻밤만 버텨 보게."
그는 자신이 던진 독침보다 위협적인 눈으로 여인을 노려봤다. 그녀는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붙잡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제 날 어쩔 셈이냐?"
"글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날 죽이면 가단회는 물론이고 금의위에서도 네놈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기세 등등하고 위협적인 말이었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은 이기지 못해 가늘게 떨렸다. 사내의 입술이 경멸로 뒤틀렸다.
"그런가? 이거야 원, 너무 겁이 나서 자살하고 싶군."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 봐 주지!"
희푸런 칼날이 부드러운 원호를 그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왼쪽 귓가에 무기질의 차가운 감촉이 전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불타는 듯한 통증이 습격했다. 툭, 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귀 옆머리가 나풀나풀 끊어져 나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허전해진 귓가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딱딱한 귓바퀴도 차가운 귓볼도 만져지지 않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에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것이 뜨뜻미지근한 핏물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발치에는 피투성이가 된 납작한 귓바퀴가 조용히 늘어져 있었다.
사내는 칼끝으로 귓바퀴를 찍어 올리더니 그녀의 눈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초씨 어르신을 만나 꼭 이렇게 전하게. 두 번 다시 날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다간 금의위와 가단회와 함께 맺은 지저분한 삼각관계를 온 세상에 폭로해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말씀이야. 너 역시 마찬가지야.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반대쪽 귀도 이렇게 해 주겠어."
그는 서서히 칼을 내렸다. 백옥처럼 하얀 여인의 목덜미에 피로 물든 고깃덩이가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살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에 전율하며, 눈에서 치욕의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렸다.
"앞으로 거리에 나갈 때마다 뭇 남성들은 차마 당신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할 거야. 내가 보증하지. 거울 앞에 서서 몸단장을 할 때마다 내가 당신에게 보다 나은 미모를 선사해 줬다는 사실을 기억해 준다면 고맙겠군. 그럼 잘 있어. 날 그리워하며 뒤를 쫓을 필요는 없을 거야."
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칼을 칼집에 꽂아 넣고 빙글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넓은 등에는 원한을 품은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녀는 악을 썼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초옥이 그의 등 너머에 펼쳐진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녀의 목소리도 함께 멀어져 갔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수풀이 무성한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사방이 조용하고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빌어먹을, 아주 귀찮게 됐군."
망나니 하나의 목을 은자 닷 냥과 바꾼 것은 대단히 수지맞는 장사였지만, 그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는 것은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들은 결코 녹녹치 않은 상대였다. 성인군자인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더러운 짓에 손을 대는 초영신과, 금의위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세를 불린 가단회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내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한두 해는 중원을 떠나서 몸을 숨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도중에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몽고에 가는 일거리가 하나 있었지?'
성공했을 때의 보수는 은자 서른 냥, 한밑천이 되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하지만 몽고까지 가는 데만 여러 달이 걸렸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손대길 포기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당면한 위협에 비하면 그 정도의 위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도박을 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가볍고 활기찬 기세였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처럼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머리뿐, 나머지는 붙어 있든 떨어져 있든 상관 없었다. 찾아야 할 머리의 이름은 현무문 청풍당의 당주 허윤. 사내는 허윤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녀석의 목이 과연 은자 서른 냥의 값어치가 있을지 궁금해지는군!'


